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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혜음원지 2차 발굴조사

2002-06-04 15: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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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혜음원지 2차 발굴조사 지도위원회 개최 혜음원지의 전체 규모는 약 12,000㎡(4,000평) 이른다. 그 중 2001년 도와 2002년도 발굴조사된 지역은 전체의 1/3 정도로 추정된다. 하지 만 두 차례에 걸친 조사 성과는 예상외로 커서 초창시 혜음원지의 모습 과 이후의 변화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현재 조사가 완료된 지 역은 발굴조사 전에는 잡목이 덮여 있었으며, 10여년 전까지 군부대 훈 련장으로 사용되었다고 전한다. 그 후 경작지를 개간하는 과정에서 일 부는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하여 굴착되거나 민묘가 조성되면서 훼손 되었지만 다른 지역에 비하여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현재 혜음원지에 서 유구가 잔존하고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발굴조사 결과 상부 유구는 거의 유실되었지만 다행히 하부 유구는 남아 있어서 건물지의 구조, 규모, 배치 상태 등을 파악할 수 있었다. 혜음원지는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서서히 낮아지는 계곡부에 축조 되었다. 비록 급경사는 아니지만 산지인 관계로 건물을 축조하기 위해 서 지형에 따라서 東西 방향으로 여러 단의 축대를 쌓아 평탄지를 조성 한 후 건물을 축조하였다. 아직 혜음원지의 전체 모습을 짐작할 수 있 을 정도로 발굴조사가 진척되지 않아서 전체 건물지가 몇 단을 이루고 있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현재까지 조사된 건물지는 그 구조와 배 치상태로 크게 2지역으로 구분된다. 즉 A~G 건물지와 I~P 건물지로 구분된다. 두 건물군은 I 건물지 북쪽의 축대와 담장으로 구획되어 있 었다. 이중 전자는 행궁지로 추정되며 후자는 원지로 추정하여 보았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후술하겠다.) 아직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어서 각 건물의 성격과 구조 배치에 대한 고찰에는 무리가 따르고 그 결과도 앞 으로 발굴조사가 진행되면서 다소 유동적일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발굴된 유구를 정리하는 의미에서 행궁지와 원지로 나누어 건물지의 배치 상태 및 구조, 성격 등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 (추정)行宮址 1) 配置와 構造 (추정)행궁지(이하 행궁지로 칭한다)는 남쪽의 석축 및 북쪽과 동쪽 경사면에 시설된 석축과 담장에 의하여 완전히 폐쇄된 공간이다. 출입 은 행궁지 남쪽 석축에 있는 3개의 계단과 북쪽 담장의 쪽문을 통해서 만 가능하다. 이곳의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지는 B 건물지이다. 주향이 남서 30。 인 정면 9칸×측면 3칸의 대형 건물지이다. 이 건물지를 중심으로 좌우 대칭을 이루며 건물이 배치되었다. 그런데 B 건물지 4번 열~7번 열 초석은 1번 열~3번 열, 8번 열~10번 열 초석과 橫線이 일치하지 않으 며 초석의 높이도 약간 높다. 따라서 단일 건물로 볼 수 없고 모두 3동 의 건물이 동서방방으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중 앙에 정면 3칸×측면 3칸의 건물이 있고 동쪽과 서쪽에 각각 정면 2칸× 측면 3칸 규모의 건물이 배치된 구조였을 것으로 보인다. 지붕 구조는 중앙 건물이 높고 동․서 건물은 이 보다 낮았던 것으로 보이며 중앙 건 물 측면에 동․서 건물 지붕선이 연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머지 건물들은 B 건물지를 중심으로 좌우대칭을 이루며 세워졌다. 우선 B 건물지 동․서로 각각 정면 2칸×측면 1칸의 소규모 부속건물 이 위치하는데 정면이 모두 B 건물을 향하도록 하였다. 그 남쪽으로는 단을 이루며 낮아지고 여기에는 모두 4동의 독립적인 건물이 배치되었 다. 중앙에 동서 9.2m×남북 10m 규모의 마당이 있었다. 그 남단에는 (추정)院址로 통하는 중문과 계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중문 은 관련된 유구가 유실되어 정확한 구조와 규모를 알 수 없다. 다만 계 단의 폭이 약 2.5m 정도인 것으로 보아 문의 폭도 이와 비슷할 것으로 생각된다. 마당 북쪽에는 B 건물지로 오르는 계단이 있었지만, 모두 유실되고 현재 흔적만 남아있다. 마당 동․서쪽에는 각각 정면 3칸×측 면 2칸으로 규모와 구조가 같은 건물(E․F)이 마주보고 있었다. 그 뒤 에도 각각 정면 3칸×측면 3칸으로 역시 규모와 구조가 동일한 건물 (D․G)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남북 방향을 장축으로 하여 정면이 동․ 서 방향을 향하도록 하였다. 또한 4개의 건물 모두 북쪽 기단은 B 건물 지 남쪽 기단열과 접하고 남쪽 기단은 행궁지 남쪽 석축과 접하였던 것 으로 보인다. D․E 건물지 사이와(서쪽 통로), F․G 건물지 사이(동쪽 통로)에는 폭(동서) 3.8m×길이(남북) 10m의 동일한 규모의 통로가 위 치하였다. 두 통로의 남단에도 각각 출입문과 계단이 있어서 I 건물지 에서 행궁지로 출입할 수 있었다. 또한 북단에도 B 건물지로 통하는 계단이 있었다. 또한 A․D 건물지 사이에는 폭 1.8, 길이 2.5m 정도의 연결통로가 있는데, 역시 C․G 건물지 사이도 동일한 규모의 통로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행궁지의 우수를 처리하기 위한 배수시설도 노출되었다. ①A 건물 지, B 건물지 서쪽․북쪽에서 모아진 우수는 D 건물지 북쪽 기단에서 모아져 A․D 건물지 사이 통로를 지나는 암거를 지나고, 다시 D 건물 지 서쪽 기단 앞으로 흘러서 중단 석축에 있는 암거를 통하여 밖으로 배수되었다. ②서쪽 통로에 모아진 우수는 서문지 서쪽에 붙어있는 암 거를 통하여 남쪽 석축 밖으로 배수되었다. ③중앙 마당에 모아진 우수 는 중문지 동․서에 있는 암거를 통하여 역시 남쪽 석축 밖으로 배수되 었다. ④동쪽 통로에서 모아진 우수는 배수로가 유실되어 분명하지 않 다. 남쪽 석축에 있는 출수구의 배열로 보아 중문지 동쪽 암거를 통하 여 밖으로 배수된 것으로 보인다. ⑤B 건물지 동쪽․북쪽, C 건물지 주변, G 건물지 동쪽 등의 우수는 G 건물지 동쪽 기단 전면과 축대열 사이에 형성된 배수로를 따라서 행궁지 남쪽 석축 東端에서 아래로 내 려가고, 배수로 1을 따라서 P건물을 향하여 배수되었다. C 건물지 북 쪽 기단과 동쪽 기단이 만나는 부분에는 집수정 2가 발굴되었고 담장 반대편에서도 역시 집수정 1이 발굴되었다. 두 집수정 사이에는 암거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축대 붕괴과정에서 유실되어 흔적을 찾 기 어렵다. 여기로 내려온 지하수나 우수도 배수로 1을 따라서 배출되 었다. 2) 性格 이 지역의 모두 유구 하부에서 원토층이 노출되고 있고, 출토되는 유 물도 시기 차이가 없다. 창건 당시의 건물 배치가 그대로 드러난 것으 로 볼 수 있다. 이 건물지의 성격을 살펴볼 때, 제일 먼저 주목되는 것 은 건물의 배치 상태이다. 중앙에 대형 건물을 중심으로 부속 건물들 이 좌우대칭을 이루며 배치되고 있다. 건물 배치가 일정한 격식을 가지 고 이루어진 것이다. 이 건물지가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특수한 용도 로 사용하기 위하여 축조된 것 일 가능성이 크다. 건물의 구조에 있어서도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B 건물지의 경우 내 부 2열의 초석 간격이 바깥쪽 초석 간격 보다 커서 내부 공간 활용을 극 대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D 건물지와 G 건물지도 마찬가지 이다. E 건물지와 F 건물지는 초석의 횡렬은 3.5m이지만 종렬 간격은 1.3m로 일반 건물 보다 좁다. 이 경우 내부의 공간이 3부분으로 나누어 져 일반적인 건물의 용도로 구분되는 것이다. 또한 석축과 담장에 의하 여 공간이 완전히 폐쇄된 고립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온돌시설이나 다른 난방시설도 발견되지 않는다. 출토된 유물도 건물의 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발굴하는 과정에서 용 두와 치미를 비롯한 다량의 귀목문 막새기와가 출토되었다. 평기와의 경우에도 태토가 정선되고 분할 상태가 깨끗하며 앞면을 정면하는 등 고급품이었다. 초석과 기단석을 비롯한 석제품도 잘 다듬어져 있었다. 이상으로 보아 이 건물지는 특수한 목적으로 조성되었던 것으로 판단 할 수 있다. 우선 혜음원이 사원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것이 법당 공간이었을 가능성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찰과 원이 같이 있을 때 원과 사찰의 공간이 분리되어 있다. 용두와 치미를 비롯 하여 다량의 귀목문 막새기와 등 고급건물에 쓰이는 유물이 출토되었 기 때문에 법당구역으로 볼 수 있기도 하다. 「혜음원신창기」에도 의 하면 혜음원에 법당이 있었다고 기록되었다. 그러나 이곳을 법당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첫째, 법당 구역 일 경우 전면에 큰 마당이 존재하지만 여기에는 마 당 공간이 좁다. 둘째, 법당 구역일 경우 개방된 구조를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하 지만 이곳은 사방이 폐쇄되어 凡人이 근접하지 못하게 하였다. 통행 은 남쪽 석축에 시설된 3개의 출입문으로 만 가능하도록 하였고, 그 것도 좁은 통로를 거치도록 하였다. 셋째, B건물지 뒤에는 계단식으로 후원을 조성하여 넓히고, B건물지 동쪽․서쪽 기단에서 북쪽 담장까지 담장을 쌓아서 완전히 폐쇄하였 다. 이는 B 건물지의 주인공이 고위신분의 사람임을 암시하고 있다. 셋째, 출토된 유물과 유구 가운데 불교와 관련된 것이 존재하지 않는 다. 이 같은 사실로 보아 이 곳을 법당 구역으로 보기에 문제가 있다. 그 렇다면 이곳은 어떤 용도로 축조되었을까? 이 문제를 규명하려고 할 때 「혜음사신창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주목된다. “임금께서 남쪽으로 순수하신다면 행여 한 번이라도 이곳에 머무르 실 일이 없지 않으리니 이에 대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하여 드디어 따 로 別院 한 개소를 지었는데, 이 곳도 아름답고 화려하여 볼만하게 되 었다. 혜음원에 행궁이 세워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곳을 바로 「혜음사신 창기」에 기록된 별원 즉 행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건물의 배치나 구조가 궁궐 건축에서 볼 수 있듯이 좌우 대칭 구조를 이루고 있고 각 건물의 구조가 특수한 용도로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또 한 용두와 치미를 비롯한 출토 유물도 행궁이었을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고려 숙종․예종대에는 국왕의 南京 순행이 자주 있었고 그 경로는 혜 음원을 지나가는 것이었다. 혜음원이 예종의 명에 의하여 축조되었 던 만큼 빈번한 국왕의 남경 행차를 대비 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혜 음원은 개경과 남경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고 주변에는 마땅한 국왕의 유숙처가 없다. 때문에 혜음원에 국왕의 남경 행차시 유숙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따라서 B 건물지가 正殿에 해당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전을 중 심으로 부속 건물을 좌우대칭으로 격식을 가지고 배치되었던 것이다. 또한 행궁이기 때문에 석축과 담장으로 폐쇄하여 하단 건물지와 구분 하고 凡人의 근접을 막았던 것이라 하겠다. 2. 院址 1) 配置와 構造 院址는 경작과 민묘 조성과정에서 많은 유구가 유실되었다. 2001년 도 조사시 일부가 노출되었고 2002년 발굴조사에서 나머지가 노출되었 다. 그러나 중앙계단을 중심으로 동쪽 지역은 대체로 발굴조사가 완료 되어 모든 잔존유구가 노출되었으나 서쪽 지역은 민묘와 경작지로 인 하여 아직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따라서 정확한 구조나 건물의 배치는 추후의 발굴조사를 중앙계단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의 구조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먼저 가장 북쪽에는 2001년 조사시 노출된 I건물지가 자리잡고 있다. 이 건물지는 중앙부에 1칸 규모의 통로가 있고 이를 중심으로 좌우대칭 을 이루는 건물이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행궁지와는 축대와 담장을 통해서 구분되었고 행궁지 남쪽 축대와 I 건물지 북쪽 기단열 사이는 배수로로 활용되었다. I 건물지 전면에는 석축이 있고 이 석축에 중앙부에는 계단지가 있 다. 현재 3단 정도가 남아 있고 계단 우석 일부도 잔존하고 있다. 석축 의 높이로 보아 원래는 5단 정도가 아닌가 한다. 이 계단을 중심으로 좌 우에 K건물지와 L건물지가 배치되어 있었다. K 건물지는 민묘로 완 전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L 건물지와 동일한 형태와 구조였 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두 건물지는 모두 정면 2칸 ×측면 1칸 크기 로 규모가 동일하며 서로 마주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L 건물지 뒤(동쪽)에는 L 건물지와 같은 주향을 가진 M 건물지가 있 었다.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1칸이다. 아마도 같은 규모와 형태의 건 물이 K 건물지 뒤편(서쪽)에도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院址도 행궁지와 마찬가지로 좌․우 대칭구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정확 한 것은 민묘의 이장 후 발굴조사를 실시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K․L 건물지 전면에는 N 건물지가 있다. 중앙에 정면 1칸 ×측면 3칸 의 문지를 중심으로 좌우 정면 4칸×측면 1칸의 건물지가 붙어있었다. 이중 동쪽 건물지는 완전히 노출되었으나 서쪽 건물지는 민묘가 있어 서 정면 2칸×측면 1칸 정도만 노출되었다. 동쪽 기단은 M 건물지 서 족 기단과 젛아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서쪽 기단도 현재 민묘터에 있었 던 (추정)J 건물지동쪽 기단에 붙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앙에는 동서 11m, 남북 10m 규모의 마당이 있었다. 마당 중앙에는 박석이 일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I 건물지와 N 건물지를 연결하는 보도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L 건물지와 M 건물지 사이에도 남북 10m, 동서 2.5m 내외의 공간이 있었다. (추정) J 건물지와 K 건물 지 사이에도 같은 규모의 공간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과 같이 이번에 발굴된 院址는 기본적으로 ‘ㅁ’자 형태의 건물 배 치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 사이에 2棟의 건물지를 배치하여 전체적 으로는 마치 四자의 형태에 가까웠다. 그런데 원지 동쪽 하단으로 O 건물지와 P 건물지가 계속 연결되어 있다. O 건물지는 유구의 1/2 이 상이 파괴되어 정확한 규모를 알 수 없다. 공간으로 보아서는 5칸×1칸 규모의 건물이 들어갈 수 있지만, 남쪽에 P 건물지가 누각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정면 4칸×측면 1칸으로 추정된다. O 건물지 앞에는 발굴조 사 전 도랑이 있었고, 그 때문에 유구가 모두 유실되어 건물지의 존 재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결국 지금까지 발굴된 건물지 배치로 보아 원지는 ㅁ자형구조에 동쪽으로 서쪽을 향한 건물이 1동 또는 2동 정도 가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여기에 남쪽으로 누각형의 건물이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원을 구성하던 건물 지가 모두 들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원을 형성하였던 건 물이 어떤 형태로 배치되었는지 좀 더 발굴을 진행하여야 분명해 질 것 이다. 院址는 독특한 건물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측면은 모두 1칸으로 되어 있고, 정면은 M건물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지가 2칸, 4칸 등 짝수 를 이루고 있다. 건물은 모두 적심위에 초반을 올리고 다시 그 위에 팔 각형 혹은 사각형의 초석을 올렸다. 초석에는 홈을 파서 심방석을 연 결하여 각 방을 구별하였다. 초석간의 거리는 평균 3.5m로 넓은 편이 다. 화덕으로 추정되는 시설이 I 건물지에서 5기의 N 건물지에서 1기 등이 노출되었다. I 건물지의 경우 화덕은 2칸마다 1개가 시설되어 있 는데, 방 1칸과 화덕시설이 들어간 1칸이 쌍(set)을 이루고 있다. N건 물지 화덕은 비록 대부분 파손되어 원형을 잃었지만 그 형태는 I건물 지 화덕과 유사한 것이었다. 아마도 원지의 모든 건물이 모두 방 1칸과 화덕시설이 들어간 1칸이 쌍(set)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화덕 시설의 용도는 정확하지 않지만 온돌이 없는 것으로 보아 난방시설일 가능성이 높다. 이 시설이 취사와 관련될 가능성도 있지만 건물내부에 있고, 이것이 취사시설이라면 공간활용에 문제가 있기 때 문에 난방시설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그 구조 가 어떤 것인지는 출토된 예가 드물어 추정하기 어렵다. 2) 性格 「혜음사신창기」에 의하면 혜음원에는 크게 법당, 숙박시설, 주방, 창 고, 行宮(別院) 등이 복합된 구조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크게 사찰 일 곽, 원 일곽, 행궁 일곽 등으로 구분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은 각각 별도의 구역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까지 발 굴된 건물지를 살펴보면, 이 중 여러 가지 조건으로 보아 행궁지는 북 동쪽의 A~G 건물지들로 구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이제 院 址와 法堂․승방지가 어디였는지 문제이다. 아직 건물지 전체가 발굴 된 것은 아니어서 그 성격을 속단하기에 이르지만 현재까지 노출된 건 물지 유구의 상황으로 보아, I~P 건물지는 원지로 추정된다. 이것들 을 원지로 추정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 난방 시설로 추정되는 화덕시설이 들어간 1칸을 포함한 정면 2 칸×측면 1칸을 1쌍(set)으로 1실을 구성하고 있다. 이렇게 구성된 1실 은 초석과 심방석의 배치로 보아 벽으로 막혀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M 건물지 뒤에서 세탁 및 목욕과 관련된 시설이 존재하고 있 다. 즉 이것은 원지에 묵는 여행자들에게 목욕 및 세탁 등의 편의를 제 공하기 위한 시설로 보인다. 그러나 행궁지와 너무 붙어 있고, 중앙에 대형 문지가 있으며, 누각형 태의 건물이 부속되어 있는 점등으로 미루어 보아 행궁지의 부속 건물 일 가능성도 아직은 배제하기 어렵다. 여기에서는 일단 院址일 가능성 에 무게를 두고 있으나 다른 해석의 가능성도 열어두고자 한다. I~P 건물지가 원지일 경우 여기에는 여행자들이 숙박하는 방 이외에 도 주방, 창고 등 급식과 관련된 시설 및 식량과 집기를 보관하던 창고 가 필요할 것이다. 이점에서 M 건물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숙박용 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지는 짝수칸으로 떨어지지만 이 건물지는 정면 3 칸×측면 1칸으로 홀수칸으로 떨어진다. 건물 뒤에는 목욕 및 세탁시설 로 추정하였지만 성격이 분명하지 않은 집수조와 도수시설이 있다. 이 시설들은 물을 끌어들이고 저장하는 시설이라는 점에서 목욕, 세탁 등 과 관련될 가능성도 있지만, 주방과 관련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 다. 기록에 의하면 혜음원에는 급식을 위한 주방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부근에서 자기편이 많이 출토되었던 것도 주목된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려 있지만 각 건물의 성격을 추정하기에는 자 료가 부족하다. 현재 발굴된 건물지 각각의 성격에 대한 분석은 시간 을 가지고 좀더 면밀하게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3. 出土遺物의 檢討 2001년과 2002년 두차례의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고려 시대로 추정된다. 출토유물은 당시 건물의 성격 및, 규모, 건립시기를 규명하는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여기서는 2001년과 2002년에 출토된 유물을 종합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1) 기와류 기와류는 조사된 전 지역에 걸쳐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특히 건물지 외 곽에 설치된 배수로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출토기와는 고려시 대 기와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그 이전시대로 올라가는 기와들은 출토되지 않았다. 대부분 유물들이 동일한 문화층에서 출토되는 것으 로 보아 조사된 지역의 건물들은 모두 유사한 시기에 창건되어 운영되 다가 한꺼번에 화재에 의하여 폐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와의 종류는 평기와류와 막새류가 주종을 이루며, 다양한 용도의 특수기와 가 출토되었다. 막새류는 연화문 수막새가 일부 출토되기도 하였지만 고려시대 전형적 인 귀목문 수막새와 암막새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1차 조사에서는 연 화문 수막새는 크기와 문양에 따라 2종류가 소량 출토되었는데, 특수 한 용도를 위하여 제한적으로 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막새류 는 막새면의 문양 수법에서 정연한 것이 주류를 이루지만 조잡한 것도 있어 건물의 지붕부를 부분적으로 번와 또는 보수를 위하여 제작 사용 되었음도 알 수 있다. 수막새는 막새면 지름에 따라 Ⅰ․Ⅱ․Ⅲ․Ⅳ가지 유형으로 구분되며, 문양이나 용도에 따라 10여종으로 분류된다. 대형 수막새의 막새면 지 름은 15cm이다. 2001년 조사시에는 대․중․소의 세가지 유형으로 분 류되었으나, 2002년 조사에서 초소형의 11㎝의 수막새가 출토되어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되었다. 암막새도 수막새와 마찬가지로 막새면에 따라 10여종으로 분류된다. 막새면 좌우에 2개의 귀목문을 장식한 전 형적인 고려시대 기와로 외곽이나 귀목문 주위에 1조나 2조로 돋을띠 를 돌렸다. 암막새 중에서는 막새면 외곽에 윤곽대를 돌리고 낮은 귀목 문만을 시문한 것도 있고, 막새면을 자른 형태도 있어 모서리 등 특수 한 용도에 사용하기 위하여 제작된 것들도 출토되었다. 암막새에 명문 이 있다. 막새면 좌우에 귀목문을 두고 그 사이 중앙에 세로로 “惠蔭 院”이라 양각하였다. 평기와의 명문은 제작 시기나 장소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중 에서 간지와 “惠陰寺” 명이 새겨진 것이 출토되었다. 명문으로 보아 院 과 寺의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으며, 寺가 院을 관리 운영하였던 것으 로 추정된다. 2001년과 2002년 조사 모두 출토되었는데, 막새면에 새겨 진 명문은 「惠蔭院」의 「蔭」자에 「艹」변이 있으나, 평기와의 「惠 陰寺」의 「陰」자에는 「艹」변이 없이 양각되어 주목된다. 문양평기와는 대형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수키와는 문양이 소문화되 어 무문이 대부분이며, 암키와는 선문․어골문․사격자문 등 다양하 며, 기하문과 복합문이 다수 확인된다. 기와 안쪽면에는 모골에 마포 를 대고 성형한 흔적이 역력하며, 주로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와도를 그 은 후 분할하였다. 암키와 중에서 명문기와가 다량 출토되었는데, 마모 가 심하여 정확한 판독은 어려운 상태이다. 명문이 새겨진 암키와들은 장방형의 額을 마련하고 그 사이에 양각하였다. 이 외에도 특수한 용도에 사용하기 위하여 별도로 제작된 기와들과 치 미편과 용두편, 잡상편, 귀면기와도 출토되었다. 치미편은 몸통․날 개․꼬리 부분 등이 일부 출토되었다. 용두편과 잡상편은 다양한 조형 미을 보이고 있다. 그 외 못을 박아서 쓸 수 있도록 구멍(釘孔)이 뚫린 이형기와도 있다. 2) 자기류 두 차례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자기류는 크게 고려청자와 중국백자로 나뉘며 분청사기도 소량 포함된다. 혜음원지에서 출토된 고려청자는 유약과 태토가 아주 정선되고 비색을 띠며 굽받침에 있어서도 규석을 받쳐 갑발안에서 정성스럽게 구운 고급청자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지 방가마에서 번조한 조질청자도 드물게 있다. 기종은 완, 바리떼, 접시, 대접, 잔, 뚜껑, 도침 등이다. 자기에는 음각 앵무문, 양각 포도문, 상 감 뇌문․국화문, 퇴화 국화문을 시문하였다. 고려청자 중에서 비색에 문양이 들어가고 규석받침을 사용한 고급청 자는 주로 11~12C에 한정적으로 나타난다. 전체적인 청자의 기형과 문양을 볼 때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 10-Ⅱ층 출토품과 비슷하지만 규석 받침을 한 것으로 보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생산품으로 추정된다. 공 반하여 출토되는 중국자기류는 기형이나 색, 문양, 번조방법 등으로 보 아 宋代의 定窯와 景德鎭窯의 생산품으로 추정된다. 출토된 자기의 전체적인 편년은 11~14C로 생각되며 분청사기도 소량 이나마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15C까지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3) 토기류 혜음원지에서 출토된 토기는 호․옹류와 병류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파손되고 결실부분이 많아 복원되는 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토기 류는 2001년 발굴조사에서는 많이 출토되었으나, 2002년의 조사에서 는 대부분 편으로 수습되어 복원되는 것이 없다. 그러나 다른 유물의 양상으로 보아 2001년과 2002년 발굴조사 지역간의 유물의 양상은 거 의 비슷한 것으로 생각된다. 호류는 광견호, 단경호, 편호 등의 기종이 파악된다. 높이 20㎝ 내외 로, 경부가 없거나 아주 짧게 올라가며 외반되고 바닥이 편평한 평저 형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토기질은 아주 무른 연질이거나 경도가 높 은 연질이 많다. 편호는 4면이 눌려진 형태가 확인된다. 옹류는 회청 색 경질로, 평저의 바닥에 배가 부른 형태로 추정되는데, 대부분 파편 이기 때문에 전체 기형파악은 어렵다. 병은 반구형의 형태를 가진 구연부편들과 매병이 출토되었다. 대부 분 회청색의 경질이다. 매병의 기형을 가진 토기편은 일부 복원이 되 었는데, 자기의 매병과 기형이 유사하다. 수습된 고려시대 토기편에서는 돌려쌓기와 물레를 이용한 제작방법 이 관찰된다. 타날기법을 사용한 정면방법은 대형토기의 내외벽에서 다양한 문양의 박자흔으로 확인된다. 또한 회전력을 이용한 물손질흔 은 대부분의 토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4) 기타 유물 그 외 청동제 및 철제류, 토제류 등이 출토되었다. 철제류는 주로 건 축부재로서 사용되는 철정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청동제류는 향완, 청동발, 동곳, 개원통보와 용도불명의 청동제품이 출토되었다. 4. 기록․유구․유물로 본 혜음원의 변화 「혜음사신창기」에 의하면, 혜음원은 1120년 봄 2월에 착공하여 1122 년 봄 2월에 완성되었다. 이 때 혜음원에는 불당, 원, 창고, 주방 등이 모두 갖추어졌다고 한다. 법당을 중심으로 한 사찰 일곽과 원 일곽으 로 나누어졌던 것 같다. 그런데 이후 국왕의 남경행차를 대비하여 별원 (행궁, 이하 행궁)을 조성하게 되었다. 「혜음사신창기」의 기록으로 보 아 행궁의 조성은 1122년 이후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 내용으로 보아 1122년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발굴조사에서 행궁의 축조시기을 짐작할 수 있는 단서가 출토되었다. 그것은 「戊申 年」銘 명문기와이다. 이 기와는 모두 동쪽 축대와 담장 주변에서 출토 되었다. 이 부분의 유구 역시 수축의 흔적이 있다. 이 담장과 축대는 행궁을 둘러막기 위해 시설한 것이다. 다라서 행궁지의 축조시기와 담 장 및 축대의 축조시기는 일치할 것이다. 여기 무신년에 비정되는 시기 는 1128년, 1188년, 1248년, 1308년 등이 있다. 이 중 가장 주목되는 시 기가 1128년이다. 혜음원의 모든 건물지가 1144년에는 완성되어 있었 기 때문이다. 1128년이라면 혜음원신창기의 기록과도 부합된다. 아직 조사가 더 진행되어야 분명하겠지만 일단 행궁지의 건립연대는 1128년 경으로 추정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후 혜음원은 운영의 어려움을 겪게되고 점차 쇠락해졌던 것 같다. 그런데 인종과 왕비 임씨가 혜음원의 후원세력으로 등장하면 서 혜음원은 다시 활발히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종과 왕비 임 씨가 혜음원의 적극적인 후원을 시작한 시점이 언제인지 분명하지 않 지만 대체로 「혜음사신창기」가 찬술된 1144년경으로 보는 것이 무난 하지 않을까 한다. 1144년 이후 혜음원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와서, 혜음원에 관한 기록은 ꡔ신증동국여지승람ꡕ 권 11 파주 역원조 와 고적조에에 보이고 있다. 고적조에는 「고혜음사」라 기록되어 사찰 은 이미 없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역원조에는 혜음원이 그대 로 있어서 院의 기능은 유지가 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 사 찰에서 운영하던 원을 모두 국유화하는 과정에서 혜음원도 국유화되 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사찰이 없어지고 원의 기능만 남았 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시대 혜음원의 규모는 고려시대에 비하여 축소되었던 것으로 추 정된다. 우선 혜음원부근에 분수원(파주 남쪽 24리), 광탄원(파주 남 쪽 10리) 등이 있었다. 특히 분수원이 헤음원의 역할을 대신하였던 것 으로 보인다. ꡔ고려사ꡕ 권 39 세가 39 공민왕 10년조에 의하면 공민왕 이 홍건적을 피하여 남행할 때, 임진강을 건너서 도솔원→분수원→사 평원 등을 거쳐서 광주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공민왕이 혜음원에 머물 지 않고 그 주변에 있는 분수원에 머물렀던 것이다. 이 때까지 혜음원 에 행궁이 있었다면 공민왕은 분수원에 머무르지 않고 혜음원에 있는 행궁에 머물렀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기록은 혜음원이 인종대의 모습 을 상실하였던 사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주목된다. 또한 ꡔ신증동국여지 승람ꡕ 파주 역원 광탄원조에 부기된 권근의 記에는 “광탄원이 양 서 울의 사이에 있어서 행인들이 많이 머문다”고 하였다. 일반 여행자들 은 대부분 광탄원을 이용하였던 사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같은 기록들로 보아 14세기 이후 혜음원의 기능은 약화되어 인근 에 있었던 분수원이나 광탄원이 그 기능을 대신하였던 것으로 추정된 다. 분수원과 광탄원이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혜음원신 창기」의 기록으로 보아 혜음원 보다는 늦은 시기에 만들어졌던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혜음원의 역할이 축소되면서 새로 만들어진 것들일 가능성이 크다. 혜음원의 기능이 14세기 이후 약화되었던 사정은 발굴 조사를 통해서도 입증되고 있다. 혜음원이 갑자기 쇠락하게된 이유로 주목되는 것은 대규모 화재에 의한 소실이다. 지금까지 혜음원지를 발 굴해 본 결과 발굴 지역 전체에 걸쳐서 약 20cm 내외의 목탄이 섞인 소 토층이 깔려 있었다. 여기에는 각종 기와들이 와적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것은 인위적으로 조성된 것이 아니라 건물이 무너져 내리면서 일시 에 쏟아져 내린 것이었다. 이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많은 양의 막새기와 도 출토되었다. 주로 막새기와가 출토되는 지역은 건물의 처마선이었 다. 이것도 화재에 의하여 지붕이 그대로 주저앉은 모습을 잘 보여주 고 있다. 이 같은 사정으로 보아 혜음원지는 언제인가 대규모 화재가 발생하여 일시에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화재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된 이후 혜음원은 어떻게 되었을까? 일 부 지역은 다시 복구가 이루어져 院으로 재건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 때의 유구로 주목되는 것이 B 건물지 상층 유구이다. 대부분 유실되 어 형태를 확인할 수 없지만 현재 남아 있는 기단석을 볼 때, 중수의 흔 적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상층유구의 기단석 하부에서는 15세기로 편년 되는 분청사기편이 발견되고 있다. 그런데 혜음원지에서 출토된 자기 류는 청자가 주류를 이루며 중국백자도 다수가 출토되었다. 청자는 대 부분 12세기에 집중되고 있다. 혜음원의 가장 활발히 운영되었던 것이 12세기였다는 기록과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13세기 이후의 분청사기 편이나 소수의 조선시대 기와편은 B 건물지 주변에서만 보이고 있다. 이는 13세기 이후 언제인가 B건물지 주변으로 사원의 규모가 축소되었 던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이는 B 건물지 상층 유구가 15세기 이후에 축조되었던 사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 밖에 다른 지역에서는 중수의 흔 적이 보이지 않고 분청사기편이나 조선시대 기와편이 출토되지 않았 다. 따라서 혜음원은 조선시대 초기에 B 건물지 부근으로 축소되어 재 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新增東國輿地勝覽 驛院條에 혜 음원이 기록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상의 기록과 유물로 보아 혜음원은 이미 공민왕 10년 이전에 12세 기의 모습을 상실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분수원 보다도 규모가 작아졌 던 것으로 보인다. 혜음원이 원래의 모습을 상실하게된 계기로 주목되 는 시기는 몽고 침입기이다. 몽고군의 침입으로 주요 역로에 위치한 역원은 거의 파괴되었으며 몽고 지배기에는 몽고가 고려의 역제에 간 섭하여 고려에는 몽고의 역참 조직이 생기기도 하였다. 때문에 기존 고 려의 역원제도는 거의 무너지게 되었다. 혜음원도 몽고군의 주 침입로 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이 때 파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분청사기 로 보아 14~15세기경에는 혜음원은 일부가 다시 복구되었던 것 같으 나 그 규모는 현저히 줄어들었으며 사찰의 기능은 없어졌던 것으로 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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