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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산성(二聖山城)

2001-05-03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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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聖山城 第8次 發掘調査 現場說明會> 2000. 7. 24. 漢 陽大學校 博物館, 河南市 I. 槪要 二聖山城은 京畿道 河南市 春宮洞에 위치한 石築山城으로 동쪽에 인접 한 춘궁동 평야지대와 함께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온 古 代山城이다. 특히, 二聖山城은 한강의 남쪽 유역에 위치하면서 주변의 삼국시대의 다른 城들을 眺望할 수 있는 지역에 축조되어 있어 군사 전 략상 중요한 지리적 여건을 갖추고 있다. 三國 가운데 가장 먼저 漢江流域을 占有했던 國家는 百濟로 溫祖가 B.C. 18년에 河南慰禮城에 都邑한 이후 475年에 高句麗의 침입으로 文 周王이 熊津으로 遷都할 때까지 거의 500년간을 領有하였다. 그러나 高 句麗의 長壽王은 475년에 百濟의 蓋鹵王을 敗死시키고 이 지역을 차지 하였다. 그러자 百濟는 551년에 新羅軍의 지원아래 한강유역을 高句麗 로부터 탈환하게 되나, 553년에 신라의 진흥왕이 백제와의 동맹을 파기 하고 한강유역을 불법적으로 점유하여 新州를 설치함으로서 한강유역 은 新羅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된다. 일찍이 先學들은 二聖山城을 포함한 이 지역 일대를 百濟의 漢城時 代 都邑地로 比定하여 왔다. 鄭若鏞, 李丙燾, 千寬宇 등은 춘궁리 일대 를 백제의 河南 慰禮城으로 비정하였으며, 洪敬謨는 二聖山城을 溫祖 王의 古城으로 보고 있으며, 金正浩는 二聖山에 百濟의 城址가 있다고 記述하고 있다. 崔夢龍과 權五榮은 二聖山城을 백제의 近肖古王이 遷 都한 漢山으로 비정하고 있다. 三國의 한강유역 쟁탈을 위한 角逐의 과정에서 二聖山城은 지정학 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 는 동안 二聖山城은 폐허가 된 채 世人들의 머리 속에서 잊혀지고 역사 기록에도 누락되었다. 다만 朝鮮朝 말의 洪敬謨가 쓴 《南漢誌》(1846) 의 山川條에 "二聖山은 金巖山의 北에 있으며 溫祖王의 城址가 있 다"고 했으며, 城址條에 "溫는祖古城은 金巖山 北쪽으로 10리쯤에 볼 록 솟은 土山으로 二聖山이란 山이 있은데 지금도 城자취가 宛然하며 지금 國有林으로 保存되어 있고 여기는 西部面 草一里이다"라는 기록 으로 二聖山城의 존재가 다시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이에 二聖山城의 규모와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漢陽大學校 博物館 이 1986년 이래로 연차적인 발굴을 시행하고 있으며, 현재 8차 발굴이 진행 중에 있다. 二聖山城은 三國이 서로 점유하려는 치열한 각축지역 이었던 관계로 遺構가 複雜多岐하게 얽혀 있어, 7차까지의 발굴상황에 도 불구하고 山城에 대한 時代的 性格이나 城壁의 築城方法 등이 정확 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금번 8차 발굴에서는 二聖山城의 시대적 성격을 보다 명확히 밝히는데 일차적 목적를 두고 발굴조사를 진행하였다. 8차 조사에 참여한 發掘調査團 構成은 다음과 같다. 調 査 團 長: 裵基同 (漢陽大學校 博物館長兼 文化人類學科 敎授) 顧 問: 金秉模 (韓國傳統文化學校 總長) 調 査 委 員: 한병삼 (文化觀光部 文化財委員) 金東賢 (東國大學校 史學科 敎授) 차용걸 (忠北大學校 考古美術史學科 敎授) 李道學 (韓國傳統文化學校 文化財管理學科 敎授) 調 査 員: 兪泰勇 (漢陽大學校 文化人類學科 講師) 方玟奎 (漢陽大學校 大學院) 金允兒 (漢陽大學校 大學院) 曺瑢瑄 (漢陽大學校 大學院) 調査 補助員: 柳泳昌 (漢陽大學校 史學科 三年) 趙榮珠 (韓國傳統文化學校 文化財管理學科 一年) 吳善英 (韓國傳統文化學校 傳統造景學科 一年) 孫智榮 (韓國傳統文化學校 傳統造景學科 一年) II. 二聖山城의 位置와 發掘過程 二聖山城은 현재의 행정구역상 京畿道 河南市 春宮洞, 草一洞, 廣巖 洞 등 세 개의 行政 洞에 위치한 二聖山 중턱을 가로 돌아 축조되어 있 다. 二聖山은 海拔 209.8m의 主峰을 중심으로 동북쪽의 德豊洞쪽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남쪽으로는 海拔 479.9m인 淸凉山에서 북쪽으로 길 게 내려오는 줄기와 만나 맥을 형성하는 金巖山(322m)의 줄기와 접하 고 있다. 한편, 淸凉山에서 북동쪽으로 갈라져 나온 줄기가 客山(291m) 을 이루고, 거기에서 다시 동북쪽으로 이어져 黔丹山(595.7m)을 형성 한다. 二聖山의 남쪽으로는 이러한 높은 산을 등지고 있지만 북쪽으로는 시야가 트여 있어 二聖山은 한강의 주변지역을 한눈에 眺望할 수 있는 地政學的 條件을 갖추고 있다. 특히, 二聖山城을 중심으로 직경 10km 내에 삼국시대의 山城이 放射線 모양으로 분포되어 있다. 동쪽으로 5km 지점의 검단산에 土石混築의 성이 존재하고 있고, 북쪽의 船洞에 龜山土城이 위치하고 있으며, 서북쪽으로 한강을 건너 8km 지점에 阿 且城이 있고, 서쪽의 천호동쪽으로 5km지점에 風納洞土城이 있으며, 서쪽으로 5km지점에 夢村土城이 위치하고 있다. 또한 남쪽으로 5km 지 점의 淸凉山에는 南漢山城이 자리잡고 있다. 이들 城들은 대체로 한 강유역을 지리적 요충지로 감안하여 축성된 것이며, 이성산성은 이러 한 성들과 매우 유기적이고도 긴밀한 관계아래 축조된 산성으로 간주 할 수 있을 것이다. 二聖山城 주변에서 조사된 先史時代 遺蹟으로는 二聖山城 서쪽의 廣岩洞과 동쪽의 校山洞에서 支石墓가 조사되었다. 渼沙洞에서는 靑銅 器時代와 百濟時代의 住居址가 발견되었으며, 특히 渼沙洞에서 百濟 時代의 밭이 발굴되었다. 따라서 이성산성 주변지역은 선사시대 이래 로 인간의 生業活動이 활발히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이들 지역에 서 조사된 考古學的 資料는 二聖山城의 政治·軍事的 位置는 물론 經濟 와 文化的 性格을 이해할 수 있는 情報를 제공한다. 이성산성에 대한 조사는 1985년에 한양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실시 된 경기도 문화유적 지표조사의 결과를 토대로 1986년에 제1차 발굴이 시작되었으며, 2000년 현재 8차 발굴이 진행 중에 있다. 현재까지의 조 사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차(1986. 8. 13 ∼ 1986. 12. 14): 이성산성에 대한 발굴조사 지역을 A에서 G로 區劃하고, A, C, E, F, G 지구에 대한 시굴조사를 실시하였 다. 조사결과 A지구에서는 성벽의 일부구조와 저수지의 존재를 확인하 였으며, C지구에서 2곳의 장방형과 12각 건물지가 발굴되었고, E지구 에서 장방형 건물지 1곳과 9각 건물지 1곳 그리고 D지구에서 8각 건물 지 1곳이 발굴되었다. 9각 건물지는 天壇, 8각 건물지는 社稷壇으로 추 정되고 있다. 2차(1987. 8. 10 ∼ 12. 6): A지구에서 저수지의 존재가 확인되었으 며, 특히 2차 저수지의 石築 일부가 露出되었다. C지구의 장방형 건물 지 2곳이 전면 발굴되었으며 12각 건물지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D지구 에서는 8각 건물지 1곳이 발굴되었다. 3차(1990. 4. 13 ∼ 7. 17): 3차 발굴은 그 동안의 발굴과정에서 노출 된 遺構들에 대한 발굴이 진행되었다. A지구의 1차와 2차 저수지, B지 구의 9각 건물지, C지구의 12각 건물지, H지구의 장방형 건물지 등이 조사되었다. 1차 저수지의 조사에서 南漢城과 須城의 城名이 쓰여진 戊 辰年銘 木簡이 出土되었다. 戊辰年는 608년, 또는 668년으로 추정되어 왔으나 8차 조사 결과 干支를 한 甲子 올린 548년으로 비정하는 것이 합리적인 듯하다. 《三國史記》와《日本書紀》에는 이 해 正月에 고구 려가 濊와 함께 백제의 獨山城을 침입하자 백제는 신라의 구원으로 격 퇴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성산성 출토의 고구려목간에 쓰인 '褥 薩'은 이 사건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4차(1991. 9. 12 ∼ 11. 14): 3차 발굴에서 마무리되지 못한 2차 저수 지에 대한 전면발굴이 실시되어 2차 저수지의 둑과 바닥층에 대한 조사 를 완료하였다. 출토유물로는 土器類, 鐵器類, 木製品, 청동방울, 빗치 개, 대바구니 등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木簡도 출토되었으나 판독되는 글자는 없다. 5차(1997. 10. 24 ∼ 12. 20): 2차 저수지의 서쪽 부분에 대한 조사가 실시되어 柱礎石으로 추정된 石材들과 대형 암반층이 노출되었다. 또 한 남쪽 성벽의 동쪽 구간에 대한 조사도 실시되었는데, 여러 차례에 걸쳐 보축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6차(1999. 3. 1 ∼ 7. 5): 1차 저수지의 발굴과 남쪽성벽에 대한 조사 를 실시하였다. 성벽의 조사과정에서 성벽이 初築과 改築의 시기를 거 쳤음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1차 저수지에서 軟質 打捺文 壺와 蓮花紋 瓦當이 출토되었으며, 저수지의 동쪽 上部 층위에서 留水池가 발견되 고 이 留水池가 성벽의 排水路로 이어져 있음이 조사되었다. 또한 C지 구의 貯水池를 試掘調査하여 低濕池의 石列이 노출되었다. 7차(1999. 11. 2 ∼ 2000. 3. 22): 推定 南門址에서 서쪽으로 성벽을 4 구간으로 나누어 조사하였으며, 이로부터 城壁의 初築이 이루어진 이 후 어느 시기에 이르러 전면적인 개축이 이루어졌음이 확인되었다. 그 리고 C지구의 貯水池에 대한 試掘區劃을 확장하여 貯水池의 전체적인 규모를 확인하였으며, 조사과정에서 木製의 唐尺이 발견되었다. III. 調査內容 城壁의 築造方法을 확인하기 위해 A지구 성벽구간의 일부를 切開하 였으며, 6차·7차 발굴조사에서 存在가 확인된 C지구의 貯水池에 대한 전면발굴을 진행하였고, 저수지 북쪽의 推定 建物址를 구획조사 하였 다. 1. A地區의 城壁切開 이성산성의 둘레는 1,665.33m이며 면적은 128,890.55㎡이다. 성의 전체적 평면형태는 부정형 5각형이며, 부분적으로 突出된 지역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데 稚의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7차까지 진행 된 本城의 조사에서 주로 건물지에 대한 발굴이 이루어졌을 뿐 城壁의 築造와 施設에 대한 조사는 비교적 未備한 편이었다. 6차 발굴에서 남 쪽 성벽의 외벽이 初築壁과 바깥벽 등 2차에 걸쳐 築造된 것으로 조사 되었으며, 7차 발굴에서는 初築壁과 바깥벽의 성격을 확인하기 위하여 조사구간을 확장하여 발굴하였다. 이번 8차 발굴에서는 城壁에 대한 切 開를 실시하여 時期에 따른 築城 方法上의 차이점을 알 수 있게 되었 다. 1) 初築城壁 초축성벽은 6차 발굴조사에서 推定 南門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처 음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8차 발굴에서 A지구 일부구간의 성벽을 切開 하여 初築城壁의 築城法을 알고자 하였다. 城壁 切開部를 중심으로 初 築壁의 특징을 살펴보면, 먼저 初築城壁의 外壁은 基壇石이 없이 장방 형의 면석이 90˚의 각도로 겉쌓기를 하였다는 점이다. 外壁 面石의 크 기는 평균 44.3×20.5cm이며 治石을 하지 않았다. 속쌓기는 불규칙한 割石을 채우고 그 공간은 진흙질의 흙으로 메꾸었다. 初築에 사용된 石 材는 黑雲母 片麻巖이다. 초축성벽은 기단석 없이 암반 위에 곧 바로 쌓았기 때문에 성벽의 基底部를 보강하기 위하여 基底部 앞에 板石을 정확하게 짜맞추어 석비레층을 造成하였다. 석비레층 위에는 흙을 다져서 성벽의 基底部를 견고하게 하였다. 실 제로 석비레층 위에서는 성벽에서 스며 나온 물이 일시적으로 멈추면 서 얇은 두께의 뻘층이 형성되었고, 이 뻘층에서 당시의 사람들이 사용 하던 木材片들이 다수 발견되고 있다. 內壁도 治石하지 않은 面石을 이 용하여 90˚의 각도로 겉쌓기를 하였다. 초축성벽의 폭은 9m이며 현재 남아 있는 높이는 2.20m이다. 2) 二次城壁 二次城壁은 初築城壁이 무너진 후, 그 위에 다시 쌓은 것이다. 성벽 절개부에는 현재 基壇石만 남아 있으나, 이 基壇石이 7차 발굴의 1구간 에 계속 이어지고 있어 7차 발굴로 노출된 1구간의 부분을 토대로 二次 성벽을 復元할 수 있다. 이번에 露出된 성벽 切開部를 살펴보면, 基壇 石 아래 부분에서 석비레층 위까지는 원래의 初築壁 上段에서 무너진 듯한 石材와 불규칙한 割石들로 채워져 있고, 그 위에는 모래가 섞인 점토질의 土砂가 얇게 덮여 있다. 二次城壁의 특징은 외벽쌓기에서 원래의 초축벽 위에 커다란 基壇 石을 水平으로 놓고 잘 다듬은 花崗巖製 犬齒石을 面石으로 겉쌓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面石도 基壇石과 수직이 아닌 약간 들 여서 城壁을 築造한 점이 初築城壁과 다른 점이다. 그리고 犬齒石의 面 石 안쪽에는 쐐기돌을 사용하여 면석들이 움직임이 없이 견고하게 견 딜 수 있도록 장치하였다. 속쌓기는 초축성벽과 마찬가지로 割石을 채 우고 그 사이를 흙으로 메꾸어 성벽이 堅固하도록 築造하였다. 二次성벽의 內壁은 초축성벽과 약간의 사이를 두고 커다란 둥근 암 반을 3층 정도 쌓고 원래 初築城壁과의 사이에는 흙으로 다져 메꾸었으 며, 반대쪽에는 진흙다짐을 하였다. 이는 아마도 홍수 등의 浸水에 대 형 石塊로 방어하기 위해 이렇게 내벽을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 서 성벽의 폭은 초축성벽보다 안쪽으로 확장되면서 약간 넓어지게 되 어 전체 10.10m이다. 二次성벽의 성벽축조양식은 전형적인 고구려 형 식이다. 따라서 이성산성의 二次성벽은 고구려에 의해 축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3) 三次城壁 三次城壁은 二次城壁이 무너진 후, 3.8m 밖에서 다시 쌓은 성벽이 다. 二次城壁의 무너진 부분을 자세히 조사해보면 砂質層이 50cm 정 도 덮여 있어 아마도 홍수로 인하여 성벽이 무너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 다. 三次城壁도 二次城壁과 마찬가지로 基壇石으로 水平을 조성한 후 花崗巖制 犬齒石을 이용하여 들여쌓기로 성벽을 축조하였다. 그러나 面石은 二次城壁에 사용된 견치석들과는 약간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 다. 즉, 二次城壁의 犬齒石은 面部가 직각이나, 三次城壁에 사용된 犬 齒石은 面部를 둥글게 다듬어서 마무리하였다. 속쌓기도 二次城壁의 속쌓기와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二次城壁은 割石을 채운 후 진흙으로 공간을 메꾸고 있지만 三次城壁은 割石을 채 운 후 흙으로 메꾸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內壁쌓기도 三次城壁은 二次 城壁과 다른데, 二次城壁은 대형 石塊를 사용하여 내벽을 견고히 하였 지만 三次城壁은 흙과 판석, 또는 흙과 강돌을 이용하여 版築다짐을 하 였다. 그리고 내벽 상부에는 三段 정도의 石築을 하고 그 앞에 排水路 시설을 만들었다. 따라서 전체 성벽 폭은 二次城壁의 폭보다 훨씬 늘어 난 11.10m나 되었다. 2. C地區 1) 貯水池 C지구의 貯水池는 石列을 長方形으로 쌓아서 만들었다. 따라서 전체 를 十字形으로 구획하여 1.5m의 둑을 제외하고는 모두 掘土하였다. 그 결과 石列이 구간에 따라 1단∼6단까지 殘存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石 築은 黑色 堆積層(제VI과 제VII층) 위에 設置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이 것은 아마도 無文土器人들이 이 지역에 거주하다 사용이 중지된 이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다음에 다시 이 곳 二聖山에 山城을 축조하면 서 이 곳에 저수지를 축조하기 위하여 바닥을 평평하게 다듬고 그 위 에 石築施設을 한 것으로 보인다. C지구의 貯水池는 전체 7개의 層位로 구분된다. 제I∼IV 층위에서는 新 羅와 統一新羅의 印花紋 土器片들이 다수 출토되고 있으며, 제V층위에 서는 심하게 파손되어 器形을 알 수 없는 黑灰色 平底土器片들과 함께 高句麗尺과 高句麗木簡이 출토되었다. 제VI 층위는 30cm 두께의 모래 층으로 형성되었으나 文化遺物이 포함되지는 않고 있다. 제VII 층위(최 하층)에서는 靑銅器時代 後期에 해당하는 無文土器와 磨製石器 등이 다수 출토되었다. 2) 推定 建物址 C지구의 저수지 북쪽은 평탄한 대지여서 건물지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 어 모두 6곳에 트렌치를 설정하여 조사하였다. 트렌치 1: 推定 建物址의 북동쪽에는 원래 일부 석축시설이 외부에 노 출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북쪽은 평탄하여 건물지가 있을 것으로 판단 하여 동서로 H字形의 구획을 설정하고 削土하였다. 削土 과정에서 건 물지의 柱礎石이 일부 露出되었으며, 주로 인화문 토기편과 격자문 기 와편이 발견되었다. 雜石으로 쌓은 석축이 트렌치 남쪽 가운데 부분에 서 북동쪽으로 이어지고 있어 건물지와 연계된 어떤 遺構인 것으로 판 단되나 정확한 성격은 알 수 없다. 트렌치 2: 트렌치 1의 남쪽 부분도 평지여서 ┻字形으로 구획을 설정하 고 除土하였다. 이곳에서도 동쪽 끝부분에서 북동쪽으로 雜石의 石築 이 발견되었다. 정확한 성격을 파악하고자 하여 동북쪽으로 구획을 확 장하여 除土를 하였으나 遺構의 성격은 파악하지 못하였다. 除土가 완 전히 이루어진 이후에야 遺構의 성격이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트렌치 3: 조사지역의 중앙에서 약간 서북쪽으로 약간의 석축시설이 있 는 土壇이 露出되어 있어 구획을 설정하고 掘土를 하였다. 그러나 인화 문계의 토기편들이 발견될 뿐 아무 시설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구 획을 북쪽으로 좀도 연장한 후 削土하자 灰槨施設이 나타났다. 조사결 과 移葬하여 이미 파손된 民墓로 밝혀졌다. 트렌치 4: 서쪽지역에 물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그 남쪽에 약수터 시설 이 있어 원래 이곳에 우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十字形의 구획을 설정하였다. 表土層을 제거해 나가자 서쪽 부분에서 無文土器·砥石·방 추차 등이 출토되어 세밀한 조사를 실시한 결과 無文土器의 住居址層 을 파손하면서 後代에 어떤 시설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동쪽부분은 대략 두 개의 문화층으로 구분되는데 상층에서 인화문계 토기편들이 다수 발견되었고 하층에서는 황갈색 또는 적갈색의 연질토 기편들이 다수 발견되고 있다. 트렌치 5: 트렌치 1의 서쪽에 土壇施設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어 남북 으로 구획을 설정하고 掘土하였다. 대략 土壇이 있던 지역에서 트렌치 4에서와 같이 대략 두 개의 문화층이 확인되고 있으며, 상층에서 완형 의 인화문 蓋杯가 출토되었다. 구획의 가운데 부분에서 연질토기가 출 토되는 암회색의 윤곽선이 발견되었다. 따라서 정확한 성격을 파악하 기 위하여 좌우 양측으로 구획을 연장하고 남쪽으로 削土를 계속해 나 가자 윤곽선이 남쪽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연질토기 사용자들이 생토면을 굴토하여 이용하던 어떤 生活遺構인 것으로 파악된다. 트렌치 6: 트렌치 2의 서쪽 지역에 잡석이 동서로 널려있어 雜石의 성 격 파악을 위하여 구획을 설정하고 조사를 실시하였다. 雜石의 남쪽부 분에서도 두 개의 문화층이 확인되나, 雜石部分에서는 인화문 토기편 들과 함께 질그릇은 물론 백자편들이 다수 출토되고 있다. 따라서 인화 문 토기의 문화층을 파괴하면서 후대에 雜石을 이용하여 어떤 石壇시 설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C지구의 추정 건물지 지역은 트렌치 4에서 무문토기 주거지가 확인되 고 있으며, 그 외의 구획들에서는 한결같이 두 개의 문화층으로 나누어 지고 있다. 즉, 문화층 상부에서는 통일신라의 인화문 토기들이 다수 출토되고 있고, 하부에서는 황갈색 또는 적갈색 연질토기편이 다수 출 토되고 있다. 따라서 이 곳 조사구역에서는 대개 無文土器, 軟質土器, 印花紋土器가 출토되는 문화층으로 시기를 구분해 볼 수 있다. 이 것 은 바로 二聖山에서의 인간이 居住하게 되는 시기와 그 후 山城이 築造 되는 時期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IV. 出土遺物 1. 木製品 C지구 저수지에서 출토된 木製品은 수량도 많고 종류도 다양하다. 여 기에서는 대표적인 木製遺物 몇 가지를 자세히 소개한다. 高句麗木簡: 韓國에서 발견된 木簡 가운데 最古의 것이며, 高句麗 木簡 으로서도 前例가 없는 것이다. C지구 貯水池의 제V 문화층에서 출토되 었으며, 전체길이는 약 35cm이다. 墨書는 네 면 모두에서 확인되었으 며, 判讀된 墨書는 다음과 같다. 1면: ……五月八日向三…吳……奴……前褥薩郭… 2면: …密……寐(?)……六月……光… 3면: ……大九… 4면: ………前 高…大九乃使 위의 글자는 출토당시에 바로 判讀된 것들이며, 나중에 X線으로 촬영 한 결과 목간에서 더 많은 글자들이 확인되고 있으나 아직 분명하지 않 아 추후에 좀더 자세한 조사가 이루어진 이후에 다시 발표하게 될 것이 다. 1면에 나타난 글자 가운데 '褥薩'은 高句麗時代의 地方 官職名이다. 高 句麗는 지방통치조직을 大城·城·小城의 3단계로 구분하고 각각의 城에 중앙관리를 파견하였는데, 이 가운데 大城의 城主로 褥薩이 파견되었 다. 金石文 또는 墨書 등에서 '褥薩'이란 明文이 보이기는 이번이 처음 이다. 한편 4면에 보이는 '前 '는 高句麗의 五部로 조직된 행정구역 가 운데 前部를 가리키는 것이며 南部라고도 불리어졌었다. 따라서 위 木 簡에 보이는 '前 高…'는 前部의 高氏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3차 발굴에서 출토된 木簡에 '南漢城'이라는 城名이 보이는데, 이를 감 안하면 高句麗의 長壽王이 475년에 한강유역을 점유한 이후 二聖山城 은 南漢城으로 불리면서 漢江以南 지역을 統轄하는 大城의 역할을 했 던 것으로 여겨진다. 高句麗尺: 高句麗의 자(尺)는 C지구 貯水池의 목간이 출토된 문화층 과 같은 층위에서 발견되었다.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현재 남아있는 길 이는 약 35cm이다. 高句麗尺은 일찍이 高句麗에서 사용하던 用尺으로 길이가 35.6cm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본의 아라이(新井 宏)는 《幻 想의 古代尺-高麗尺은 없다》라는 책에서 고구려척의 존재를 부정하였 다. 그러나 이번 이성산성의 발굴조사에서 고구려척의 실물이 출토됨 으로서 高句麗尺은 없었다는 일본학자들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동안 高句麗尺은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高麗尺으로 통 칭하여 왔다. 그리하여 일반인들은 高句麗(B.C.37∼A.D.668)의 用尺 을 高麗(918∼1392)의 用尺으로 혼동하여 왔다. 이번 高句麗尺의 出土 를 계기로 高麗尺으로 부르던 명칭을 高句麗尺으로 還元해야 할 것이 다. 腰鼓: 腰鼓는 C지구 저수지의 제II 문화층에서 출토되었다. 전체 길이 는 42cm이며, 양측면의 지름은 16cm이고, 가운데 잘록한 부분은 7cm 이다. 腰鼓는 원래 高句麗에서 만들어 사용하던 북으로 왼쪽은 채로 치 고 오른쪽은 손바닥으로 쳐서 소리를 내도록 만들어 사용하였다. 高句 麗의 腰鼓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장고의 원형으로 장고처럼 허리 가 잘록한 모습이나 그 크기는 현재의 장고보다 크기가 작다. 2. 土器類 토기류는 無文土器, 軟質土器, 灰靑色 또는 灰褐色의 硬質土器類, 벼 루 등이 출토되고 있다. 無文土器에는 平底壺, 孔列土器, 紅陶 등이 있 으며, 軟質토기에는  , 蓋杯, 鉢形壺 등이 있다. 貯水池의 제V 층에서 출토되는 軟質土器는 黑灰色의 平底土器로 內外面에 격자문으로 타날 한 것이 있고 燒成强度도 비교적 높은 편이나 출토된 유물이 口軟部, 底部, 또는 帶狀把手片 등이다. 따라서 토기의 전체적인 器形이 확인되 지 않아 토기의 성격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硬質土器에는 短脚高杯, 시 루, 小壺, 동이류, 蓋杯, 대부 등이 있으나 대부분이 印花文 系統의 토 기들이다. 3. 石器類 C지구 추정 건물지의 트렌치 4의 無文土器層에서 대형의 砥石 2점이 출토되었다. 트렌치 1의 앞에 노출된 石築 사이에서 길이 16cm, 넓이 8.9cm 두께가 4.9cm인 대형 磨製石斧가 출토되었다. 그리고 C지구 저 수지 無文土器層에서 2.8cm의 玉製品과 石製 漁網錘가 3개, 그리고 石 鑿과 石  1점이 각각 出土되었다. A지구의 1차 저수지지역 조사중 화 살을 갈기 위한 細長한 홈이 나 있는 砥石이 1점 출토되었다. 4. 鐵製類 鐵製類로는 唯一하게 A지구 1차 저수지 조사도중 鐵斧가 1점 출토되었 다. 단면은 날부분에서 몸통 중앙부분까지는 삼각형의 형태이고, 자루 를 끼우는 柄部는 양쪽을 말아 올려 단면이  圓 형태로 만들어져 있 다. V. 二聖山城 使用時期의 問題 二聖山城은 三國時代에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山城이 었다. 지금까지 7차에 걸쳐 발굴이 이루어졌으며, 현재 8차 발굴이 진 행 중에 있다. 그러나 二聖山城의 築城法이나 年代問題 등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성산성 발굴의 숙원이었던 성벽절개 가 8차 발굴에서 완료되어 이성산성의 築城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 게 되었다. 이성산성은 성벽 축조법상으로만 볼 때 전체적으로 세 시기로 구분 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각각의 시기가 역사적으로 어느 시기에 해당하 는가 하는 문제는 의문에 쌓여 있다. 그것은 계속적인 補築과 새로운 건물의 계속적인 新築過程, 그리고 오랜 세월동안의 산성이 廢城상태 로 방치되어왔기 때문에 많은 遺構들이 파괴되고 교란되어 유적의 시 기적 판별을 어렵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발굴조사된 자료들을 검토할 때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이성산성에 인간의 거주가 시작된 시점과 이성산성이 산성으로서의 역 할이 끝난 시점뿐이다. C지구의 貯水池의 最下 문화층에서 다량의 無 文土器片과 紅陶片이 출토되고 있으며, 약간의 磨製石器들이 共伴하 여 출토되고 있다. 따라서, 이성산성에 인간이 처음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靑銅器時代의 後期나 初期鐵器時代부터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성산성이 산성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마지막으로 폐허가 된 것 은 新羅 또는 統一新羅時代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朝鮮時代 後期 의 白磁片을 제외하면, C지구 貯水池의 제I층∼제IV 문화층에서 통일 신라기의 인화문 토기와 회갈색 경질의 격자문, 당초문, 어골문, 복합 문 기와들이 출토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현상은 6차 발굴에서 실 시된 A지구의 저수지 발굴에서도 같은 상황으로 나타나고 있다. C지구 저수지의 층위상황을 보면, 통일신라기의 인화문토기들이 출 토되는 층위의 아래층에서는 透窓이 없는 短脚高杯, 黑灰色의 軟質 , 暗褐色의 軟質 , 바닥이 平底 사발류 등이 출토되고 있다. 그러나 전 형적인 신라식 고배는 한 점도 출토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A지 구의 1次 貯水池에 대한 발굴조사에서는 같은 상황이 나타났었다. 즉, 1차 저수지의 아래층에서 대개 회백색 타날문 軟質壺나 赤葛색 軟質壺 등이 출토되었고, 같은 층위에서 중앙에는 원형의 子房이 자리하고 있 으며 8개의 蓮瓣이 있는 瓦當 1점이 출토되었다. 이에 더하여 三次城 壁 基壇石 아래의 土層에서 背面에 날카로운 線條紋이 타날된 적갈색 연질 기와편이 출토되고 있다. 이 적갈색 平瓦는 瓦刀를 이용하여 分瓦 한 후 내외면을 다듬어 마무리하였으며, 燒成强度는 그리 높지 않아 문 지르면 胎土가 묻어 난다. 이러한 平瓦는 C지구나 A지구의 상층에서 발견되는 다른 平瓦들과는 燒成强度, 胎土, 製作技法, 그리고 紋樣 등 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와가 어느 시기에 사용된 것 인지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 진 바는 없다. 따라서 이성산성의 성 벽 축조의 시기를 판별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출토된 토기들을 포함 한 유물들의 시기적 선후관계와 저수지 등의 土層圖 등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성산성은 그 동안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유하고 新州를 설치한 553 년에 初築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금번 발굴에서 二次성벽이 고 구려의 축성양식에 따라 축조된 것으로 조사되었으며, 高句麗木簡과 高句麗尺이 출토됨으로서 二聖山城이 高句麗時代에는 褥薩을 파견하 는 大城級의 山城이었음이 밝혀졌으며, 고구려가 長壽王이래 개척한 한반도 중부의 새로운 征服地를 통치하기 위한 鎭城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발굴된 2점의 우물 '井'자가 새 겨진 토기가 과연 高句麗土器인가 아닌가에 대한 論難은 역시 高句麗 土器로 결론지어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C지구의 추정 건물지에 대한 구획조사 과정에서 청동기시대 문화층과 軟質土器가 다수 출토되는 문화층이 확인됨으로서 先史時代 에 二聖山에서 사람들이 처음 거주하기 시작한 시기가 밝혀졌으며, 歷 史時代에 들어와서 山城이 처음 築造된 時期를 올려볼 수 있는 근거 를 얻게 되었다. 다음 발굴에서의 C지구 추정 건물지에 대한 전면적인 발굴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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