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扶餘 東羅城·西羅城遺蹟

2001-05-03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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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扶餘 東羅城·西羅城 發掘調査略報告書> 2000 忠南大學校百濟硏究所,大田地方國土管理廳 目 次 Ⅰ. 調査經緯 및 目的        1 Ⅱ. 遺蹟의 位置 및 立地        3 Ⅲ. 調査內容        3     가. 東羅城            3         1. 城壁        4         2. 水路        7         3. 城壁 周邊의 施設        9         4. 調査成果 및 意義        16     나. 西羅城        17         1. 城壁 確認 調査        17         2. 堤防 內部地域 調査        23         3. 調査成果 및 意義        34 圖 面 目 次 【도면 1】동나성·서나성 조사지점 위치 표시도        2 【도면 2】조사지역 주변 나성 분포도 (S:1/5,000)        4 【도면 3】동나성 유구 배치도(S:1/200)        13 【도면 4】동나성 주변 환경 상상 복원도        15 【도면 5】제방절개 제 4 Tr. 남벽층위(S:1/40)        19 【도면 6】서나성 유구 배치도(S:1/200)        29 寫 眞 目 次 【사진 1】동나성 조사지역 전경        5 【사진 2】성벽 층위 모습        5 【사진 3】外部 木列        7 【사진 4】제 1수로        8 【사진 5】제 2 수로        9 【사진 6】수로부 출토 삼족기 다리        10 【사진 7】수로부 출토 기대편 각종        10 【사진 8】수로부 출토 개합편        10 【사진 9】수로부 출토 구연부편 각종        10 【사진 10】枝葉敷設 通路遺構 전경        11 【사진 11】枝葉敷設 通路遺構 단면        11 【사진 12】내부 출토 擔架        16 【사진 13】내부 출토 甕        16 【사진 14】서나성 조사지역 원경(남에서)        18 【사진 15】서나성 조사지역 전경(북동에서)        18 【사진 16】제방절개 제 3 Tr. 북벽        22 【사진 17】제방절개 제 4 Tr. 남벽        22 【사진 18】제방하부 우물지 전경(남동에서)        23 【사진 19】우물 내부 축조 모습        23 【사진 20】우물 외부 축조 모습        23 【사진 21】제방하부 우물지 및 구상유구 노출모습(북서에서)        24 【사진 22】제방내부 조사지역 전경        24 【사진 23】도로유구 주변 건물지 노출모습        26 【사진 24】도로유구 남쪽 건물 구획        27 【사진 25】S-1·2·4호 주변        27 【사진 26】S-3호 노출모습        28 【사진 27】지신단지 노출모습        28 【사진 28】통일신라 밭 노출 모습        33 【사진 29】수전상부 층위 모습        33 【사진 30】서나성 Ⅱ-2 수로변 출토 모습        36 【사진 31】우물지 내부 출토 토기옹        36 【사진 32】S-2호 출토 뚜껑 각종        36 【사진 33】S-4호 동쪽 소형 수혈 유구내 출토 토기 뚜껑        36 【사진 34】S-3호 주변 Ⅱ단계면 출토 토기 뚜껑 및 대부완        36 【사진 35】지신단지        36 【사진 36】건물구획 주변 Ⅱ단계면 출토호        37 【사진 37】건물구획 주변 Ⅱ단계면 출토 동이        37 【사진 38】S-4호 주변 Ⅱ단계면 출토 기대편        37 【사진 39】S-4호 주변 Ⅱ단계면 출토 기대편 각종        37 【사진 40】S-4호 주변 Ⅱ단계면 출토 벼루편 각종        37 【사진 41】S-4호 주변 Ⅱ단계면 출토 토기 각종        37 【사진 42】수전면 출토 토기 각종        38 【사진 43】도로유구 북쪽구획 Ⅲ단계면 출토 유물 각종        38 【사진 44】Ⅲ-1 수로 내부 출토 유물 각종        38 【사진 45】Ⅲ-1 수로 내부 출토 유물 각종        38 Ⅰ. 調査經緯 및 目的 금번 조사는 부여 동나성과 서나성 구간의 일부에 대한 발굴조사로서, 부여-논산간 국도 4호선 확·포장공사 예정 노선이 현재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는 나성의 서쪽과 동쪽을 지나도록 설계됨에 따라 이루어지게 되었다. 扶餘 羅城은 우리나라 고대도성사 이해에 있어 매우 귀중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현재 史蹟 제 58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이에 공사 시행처인 대전 지방국토관리청의 의뢰를 받아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가 발굴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조사는 1999년 10월 2일부터 2000년 2월 12일까지 약 130일간 실시되었다. 그리고 금번 발굴조사를 위한 조사단구성은 다음과 같다. 지 도 위 원 : 성주탁(국사학과 명예교수)      한병삼(문화재위원) 조 사 위 원 : 차용걸(충북대학교 교수)      최맹식(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      서오선(국립부여박물관장) 책임연구원 : 박순발(충남대학교 고고학과 교수,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소장) 연 구 원 : 성정용(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객원연구원)      강종원(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객원연구원) 연구보조원 : 국성희(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조교)      강병권(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연구원)      김기범(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연구원) 보 조 원 : 이재욱(충남대학교 고고학과 3년)      이판섭(충남대학교 고고학과 2년)외 6명 금번에 조사가 이루어진 동나성 구간은 왕포천과 필서봉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곡간 충적지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지금의 왕포천과 같은 하천이 반드시 이 지점에 축조된 나성을 통과하게 되어 있다. 지금까지 나성을 통과하는 하천에 대한 처리방식이 구체적으로 확인된 바가 없으므로 이와 관련된 시설의 확인에 조사의 주안을 두었다. 이와 아울러 본 조사지점과 같은 저평지역을 통과하는 나성의 축조기법 및 성벽주변의 공간 활용 양상 파악에도 유의하였다. 한편 서나성은 지금까지 지형적 특징에 근거한 추정만 있었을 뿐 실제 나성의 상태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조사자료는 없었으므로 우선 나성 유구 그 자체의 확인에 주력하였다. 나아가 나성 주변 특히, 나성 내부 지역에 있어서의 도시공간 구획과 같은 토지활용과 관련한 자료의 확보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Ⅱ. 遺蹟의 位置 및 立地 대체로 사비시대 도성의 범위와 일치되는 지금의 부여시 일원의 지형적 특징은 북동쪽은 부소산·금성산·필서봉 등으로 이어지는 구릉들이 둘러싸고 서쪽과 남쪽은 곡류하는 금강에 의해 형성된 넓은 충적대지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사비기 백제의 도성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현 부여시가지 주변에는 부소산 금성산 등의 구릉성 지형에서 파생된 저평한 微高地가 점재한 사이 사이에 현재 논으로 경작되는 저습지가 광범위하게 발달되어 있다. 금번 조사의 대상이 되는 동나성 통과 지점은 현재 논으로 경작되는 왕포천변의 곡간 충적지이다. 이 일대는 1918년도 발행 지형도상에서도 논으로 경작되고 있음이 확인되므로 조사전 나성의 존재를 시사하는 지표적 징후는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남쪽 필서봉 서북단의 나성 흔적과 북쪽 능산리 고분군 서편 구릉지 말단에 잔존하고 있는 나성 흔적을 연결해 보면 당초 나성 통과 지점은 충분히 짐작 가능하며,실제 1991년도와 1995년도에 이루어진 발굴조사시 그 흔적이 확인된 바 있다. 서나성은 부여 시가지 서남부를 감싸고 흐르는 백마강변의 구릉성 미고지 및 충적대지의 자연제방을 따라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어 왔으나 실제 굴토조사가 실시된 바가 없어 자세하지 않다. 금번 조사대상이 된 지점은 최근에 축조된 인공 제방의 일부로서 현 지표상으로는 나성으로 추정될 만한 뚜렷한 징후는 남아 있지 않다. Ⅲ. 調査內容 가. 東羅城 동나성 조사구간 주변은 전술한 것처럼 이미 1991년도 및 1995년도 2차례에 걸쳐 조사가 이루어진 바 있어 나성 형태 및 축조기법이 어느 정도 확인되었다. 이번 조사 대상은 왕포천과 약 10여m 거리를 두고 서쪽에 인접하고 있는 논 경작지 부분으로서 신설도로의 노폭에 해당되는 폭 약 50m의 구간이다. 이 가운데 나성이 통과할 것으로 추정되는 지점은 현재 부여­논산간의 4번 국도에서 갈라져 부여군 염창리 방향으로 연결되는 소로와 대체로 일치하고 있어 본격적인 조사에 앞서 이 도로를 이설할 필요가 있었다. 조사된 지점의 평면적은 나성 안팎 지점을 포함한 길이 약 80m, 폭 약 50m 가량 된다. 조사결과 성벽은 현 지표 아래 약 2m 지점에서 노출되었다. 성벽 상부의 후대 퇴적토를 제거하여 구지표면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나성을 통과하는 후대의 수로시설과 함께 성벽으로부터 내측으로 약 10여m 떨어진 지점에서 성벽과 평행하게 설치된 백제시대 枝葉敷設 통로 유구 등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성외부에서 垓字의 흔적도 확인할 수 있었다. 1. 城壁 나성의 성벽은 폭 약 20m가량 되게 기반부를 조성한 후 가는 나뭇가지를 얇게 한벌 깐 후 泥土를 쌓아 올리는 壓密浸下排水工法를 채택하여 축조하였다. 이러한 공법은 뻘층과 같은 연약지반을 안정화하는 데에 적용되는 것이다(사진 2). 성벽의 축조과정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기반층을 정면하였다. 여기의 기반토층은 본래 저습지로 되어 있는 이곳 주위의 黑泥土層을 성벽 축조 폭 만큼 정리한 것으로 기본적으로 자연퇴적층이다. 이러한 기반토층의 양상으로 미루어 성벽축조 이전 이 일대는 왕포천 주위의 저습지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 기반토층면에 직경 2∼3cm 되는 가는 나무가지를 두께 2∼5cm 가량 깔아 기반토층과 그 위에 성토될 인공축토층 사이를 차단함으로써 습기가 많고 무른 기반층을 안정하였다. 그 위에 두께가 약 20∼30cm 가량 되는 성토층를 다져 올리고 다시 나무가지층을 깔고 성토하는 工程을 반복하였다. 이렇게 나무가지층과 성토층을 교대로 다져 쌓아 올린 성벽은 현재 가장 잘 남아 있는 부분을 기준으로 하면 기반토층 床面으로부터 약 2m 가량 되며 기반토층의 폭은 약 20m이다. 나무가지 등 식물의 줄기나 잎으로 연약한 지반 위를 까는 기초공법은 고대 토목공사에 있어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이해된다. 국내에서 이 공법이 적용된 예로는 1975년도에 발굴조사된 김제 碧骨堤가 있다. 발굴보고서에서는 이층을 벽골제 축조 당시의 구지표면에 자생하고 있던 갈대등이 깔려 압축 탄화된 것으로 보아 "植物炭化層"으로 명명하였을 뿐 연약지반 기초공법의 일환으로서 인위적으로 깐 것으로는 이해하지 않았던 듯(尹武炳 1976)하나 역시 압밀침하배수공법의 공정과 관련되는 人爲敷設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유사한 예는 1996과 1997년도에 실시된 충남 당진 合德堤 보수공사와 관련한 제방 절개조사(忠南大學校 博物館 1997)에서도 확인되었다. 합덕제는 조선시대 16세기경에 축조된 것으로 드러나 이 공법이 매우 오랫동안 채택되어온 전통적인 연약지반 기초공법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993년도에 실시된 일본 九州 大宰府 水城遺蹟 제 24차 발굴조사에서 敷粗朶(しきそだ)로 부르는 공법이 확인되어 연약지반의 "補强土工法"으로 이해하고 있다(九州歷史資料館 1994). 이곳 동나성의 경우 1991년도 조사시에 이미 이러한 공법이 적용되고 있었음이 확인되었으나 금번 조사를 통해 그 양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벽골제나 大宰府 水城에서는 최하층의 기반토층 床面에만 시공된 것에 비해 동나성에서는 성벽의 성토층 전부에 걸쳐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 시공되어 견고성을 더욱 높힌 점에서 매우 발달된 면모를 보이고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압밀침하배수공법의 예가 전술한 정도에 지나지 않아 출현시점이나 발달과정등에 대한 자세한 파악은 어려우나 이번 동나성의 예는 지금까지 확인된 것 가운데 가장 발달된 형태라는 점과 아울러 그 연대 역시 6세기 전엽경으로서 연대가 분명한 것 가운데 最古의 예에 해당된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높다. 김제 벽골제 조사자는 방사성탄소연대 결과 및 문헌사료에 근거하여 그 축조를 4세기 중엽경으로 비정한 바 있으나 未審한 부분이 없지 않다. 한편, 성벽 너비의 兩端에는 성벽선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나무 말뚝을 박아 놓은 것이 확인되었다. 말뚝의 크기는 대략 직경 5∼10cm 가량되며, 말뚝 사이의 간격은 50∼100cm 정도이다. 그리고 말뚝이 박힌 깊이는 대체로 성토가 시작되는 기반토층위의 최초 枝葉敷設層에 이르고 있다(사진 3). 이러한 말뚝은 지하수면이 높은 기반토층이 머금은 다량의 수분을 성벽 성토층으로 渗透함으로써 기초 지반의 안정과 함께 상부 성토층의 견고성 유지하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 이를 "무리 말뚝"이라 하기도 하며, 현대 토목공법에서의 Sand drain이나 Paper drain 공법과 기본원리가 동일한 것이라 한다(청주 주성대학교 토목공학과 손승우교수의 교시). 1991년도 조사시 성벽 외곽선 부분에서 확인되었던 護城石築은 금번 조사지점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지반이 연약한 저습지 통과 구간의 성벽부분에는 당초부터 그러한 석축시설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출토 유물들은 모두 조선시대의 백자편 및 와편에서부터 백제 토기들에 이르기까지 시기폭이 매우 넓으나 이는 축조 당시의 성벽이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침식되면서 그때 그때 마다 노출된 구지표면이 여러시대에 걸쳐 사용된 결과이다. 조선시대의 유물은 특히 하천에 인접하여 성벽이 많이 삭평된 북쪽 조사지점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이 부분에는 후술할 후대의 수로가 설치된 지점이기도 하다. 2. 水路 동나성은 동서로 흐르고 있는 왕포천을 가로지르고 있으므로 축조 당시 하천을 어떻게 처리하여 나성을 통과시켰는 지에 대한 궁금증이 무척 많았다. 따라서 이 문제는 금번 조사의 중요한 관심 사항의 하나였다. 다행히 제한된 발굴범위 내에서 이와 관련된 2개의 성벽 통과 수로가 현재의 하천유로에 인접한 북쪽 조사지점에서 드러났다. 편의상 남쪽의 것을 제1수로, 그 북쪽의 것을 제2수로라 명명하기로 한다. 제 1수로는 외부 성벽선 보다 더욱 바깥쪽으로 벗어난 곳에서 入水部가 시작되고 성벽과의 교차 방향도 약 80°정도를 이루고 있어 축조 당시의 성벽과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었다(사진 4). 이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서도 뒷받침된다. 성벽 성토층 床面 위에 얼마간의 암회색 遊水 퇴적토가 쌓이고 그 퇴적층 위에 수로의 상면 놓여 있는 점이 이 부분 탐색갱의 층위에서 확인되는 점, 전술한 성벽 외곽선을 따라 박아 놓은 말뚝열이 이 수로를 구성하는 割石部材과 整合的으로 관련되지 않은 채 이들을 통과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수로 구축에 사용된 석재의 대부분이 治石되지 않은 비규격적인 것이 대부분이고 그 가운데 잘 다듬은 화강암제 板狀石이나 八角石柱 등 이질적인 것이 혼재되어 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제 2수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사진 5). 다만 제 2수로를 구성하는 부재들 가운데 치석된 것이 상대적으로 많은 점이 약간 다를 뿐이다. 수로가 드러난 지점은 조사지점의 남쪽부분에 잔존하고 있는 성벽에 비해 많이 삭평된 점도 전술한 바와 같다. 이 부분은 어느 무렵엔가 하천 流水에 의해 심하게 침식 消失되어 거의 성벽 축조 당시의 기반토층 직상부에 이르는 깊이까지 삭평된 상태이다. 이와 같이 금번 조사에서 드러난 2개의 수로는 축성 당초의 것은 아니다. 후대에 이르러 하천수에 의해 성벽이 씻겨 내려간 다음 유로의 변경과 함께 이 부분을 통과하게된 하천의 일부를 건너기 위해 주변에 흩어져 있던 석재들을 모아 좁고 얕은 석재 교량을 架設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그 가설시점은 석재들과 함께 산포된 자기편들로 미루어 조선시대 16세기 무렵경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금번조사를 통해 백제시대 나성 성벽을 통과하였을 하천의 처리와 관련된 간접적인 자료들은 얼마간 얻을 수 있었다. 수로가 드러난 지점이 현재의 하천 유로와 불과 10여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인접한 곳임에도 백제시대의 물길 통과 시설이 발견되지 않은 점에서 축성 당시의 하천 유로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졌다. 이 점은 하천 건너의 북쪽 현재의 부여-논산간 4번 국도와 남으로 접한 지점에 대한 1991년도의 조사에서도 그러한 흔적이 전혀 없었던 사실을 상기할 때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현재의 하천유로가 통과하는 지점 즉, 4번 국도에서 염창리로 연결되는 소로가 왕숙천을 통과하는 교량 위치가 바로 백제시대에도 나성을 통과하는 하천 유로였을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이러한 추정과 함께 당시 이 부분의 구체적인 처리방법을 시사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것이 또한 금번 조사에서 드러난 후대 수로 구축에 재활용된 잘 다듬어진 화강암 석재들이다. 이 가운데 비록 파손되어 온전한 상태는 아니지만 현재 남아 있는 길이가 2m 가량 되는 4각 또는 8각 석주들이나 크고 작은 판석재들이 주목된다. 이러한 석재들은 석재 교량 架設에 소용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 있는 석재들로써 당시의 교량을 정확히 추정하기는 어려우나 현재의 왕포천 교량과 거의 동일한 지점에 石橋가 있었음을 추정하기에는 충분하다. 3. 城壁 周邊의 施設 금번 조사범위는 성벽을 중심으로 내외 약 20m 정도까지였다. 여기에서 확인된 시설물로는 우선, 성벽의 내측 기부 윤곽선으로부터 약 12m 가량 떨어진 지점에서 드러난 나무가지를 敷設한 유구를 들 수 있다(사진 10). 절개조사를 통해 확인된 유구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성벽 축조 당시 기반토층을 성곽과 평행하게 폭 약 4m, 깊이 약 60cm 가량 되게 파낸 다음 성벽과 반대쪽인 서쪽부분의 掘壙 주변에 가는 말뚝을 박고 다시 약 30∼40cm 두께로 흙을 다져 넣었다. 그 다음 성벽쪽 즉, 동쪽 부분의 굴광선에 연하여 50∼70cm 간격으로 지름 5cm 안팎의 말뚝을 박고 그 사이를 나무가지로 마치 織造하듯 엮어 울타리모양의 벽채를 만든 다음그 뒷부분을 흙 다짐하여 성벽 基部와 연결되는 臺地를 조성하였다. 그 결과 동쪽벽과 서쪽벽의 높이가 차이가 나게 되어 단면형이 "L"자가 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 내부 전면에 걸쳐 나무가지를 깔았다. 나무가지 부설면은 가운데가 약간 우묵하게 들어간 상태이고, 곳에 따라서2개 이상의 부설면이 약간의 퇴적토를 사이에 두고 중첩된 곳도 관찰되었다. 이 유구는 조사범위의 남쪽 끝부분 부근에서 시작되어 성벽 윤곽선과 평행하게 북쪽으로 계속되는데, 조사 지역 북단부 약 5m 가량 지역에서는 더 이상 확인되지 않았으나 이는 전술한 성벽 성토부분과 함께 하천 유수에 의해 심하게 침식된 결과로 생각되므로 당초의 상태로 보기는 어렵다.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의 총연장은 약 35m 가량된다. 이 유구의 기능이나 성격에 대해서는 아직 類例를 찾지 못해 추정하기 어려우나 성벽과 약 12m 가량 거리를 두고 평행하게 진행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나성 사용과 관련되는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이와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으나 나무가지를 깔고 양옆에 말뚝을 박아 벽체를 세운 점에서 유사성이 있는 것으로는 일본 兵庫縣 砂入遺蹟 출토 奈良時代 도로유구가 있다. 이 유적은 1990년도에 발굴되었으나 아직 정식 보고서는 未刊이다(兵庫縣 敎育委員會 中村 선생 교시). 그리고 이 유구의 동벽부분과 같은 나무 울타리모양의 시설물이 중세시대 연못 湖岸으로 사용된 예는 일본 廣島縣 草戶千軒 유적에서 확인된 바 있다. 성벽과의 관계나 일본 효고현 시나이리유적의 예로 보아 이 유구는 일단 성벽 사용시의 통로의 일종이었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 일대의 기반토층이 연약한 저습지 퇴적층이므로 견고성과 통행의 편의를 위해서는 이처럼 나무가지를 부설하여 지반을 안정시키고 침하를 방지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전술한 砂入 유적의 입지 역시 이와 거의 동일하여 이러한 나무가지 부설의 기능을 짐작케한다. 그런데, 이 유구가 성과 관련된 통로라면 왜 전지역에 걸쳐 설치되지 않고 금번 조사지점에서 보듯 일부 성벽에서만 나타나는 지에 대한 타당한 이유가 상정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유의되는 점은 이 유구의 분포가 하천이 성벽을 통과하는 지점에 인접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술한 것처럼 하천 통과 지점의 구체적인 처리와 관련된 직접적인 자료는 아직 없다. 다만 후대 수로 구축에 재사용된 치석된 석주나 판석들의 존재로 보아 당초에는 지금의 염창리 연결도로상에 놓인 교량지점에 石橋가 架設되어 있었을 것으로 판단할 수는 있다. 이 경우 하천수가 통과하는 교량의 아래 부분은 당연히 여타지점에 비해 방어상의 취약지점이 될 것이다. 이러한 취약점을 보강하기 위해서는 교량 아래 부분에 視點을 낮춰 근접 감시할 수 있는 시설이 필요하였을 것임은 추정 가능하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유구는 교량 지점을 감시하기 위한 순찰로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음, 성벽 외부 즉, 동쪽 부분의 시설과 관련하여 유의되는 것으로 성벽 하단부의 床面위에 퇴적된 遊水 퇴적층이 있다. 이 층의 두께는 성벽 축조 기반토층면을 기준으로 약 1m 가량 된다. 이처럼 이 지점에 유수 퇴적층이 형성된 것은 이 일대가 擔水面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므로 당시 성벽의 외측에는 성벽선 하단부를 마치 저수지 堤坊처럼 이용한 集水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이 부분은 垓字로 판단된다. 이 퇴적층이 비교적 양호하게 남아 있는 조사지역 남단부에 대한 탐색갱 조사 결과 집수지역의 범위는 성벽 외곽선으로부터 동쪽 즉, 외부 방향으로 약 60m 가량 이어지다가 사라지고 있음이 확인되었으므로 이 부분의 해자는 폭이 약 60m, 깊이는 약 1m 가량인 셈이다. 해자의 길이 즉, 성벽과 평행한 방향으로의 규모에 대해서는 조사 지역이 한정되어 있어 확인할 수 없었다. 북쪽 방향 즉, 현재의 하천과 인접하고 있는 조사지역의 북단부는, 성벽에 대한 설명에서 전술하였듯, 후대의 하천 유로 변동시 거의 성벽 축조시의 기반토층면까지 유실되어 이 층이 잘 확인되지 않는다. 하천 인접지점에 해자가 설치된 까닭을 정확히 말하기는 어려우나 한 가지 유의되는 점은 이처럼 폭이 넓은 해자는 유수지로서의 기능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홍수시 하천 유량이 많아지면 성벽을 통과하는 교량에 많은 부하가 걸리게 되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은데, 이 경우 수량을 인접한 해자지역으로 분산시키면 그 만큼 유속이 느려지고 그에 따라 통과 수량 역시 적절히 조절이 가능할 것임은 물론이다. 이러한 추정이 가능하다면 이 지점의 해자는 당초 하천과 연결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하천의 북쪽 인접 지역에도 이러한 해자가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능산리 사지 남문지의 남쪽부분 즉, 부여-논산간 국도 북편의 저지대가 백제시대에는 일종의 유수지와 같은 집수지역이었음이 사지 발굴시의 시굴조사에서 이미 확인되었는데, 이물은 최종적으로 도로 남쪽의 성벽을 따라 하천으로 연결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부여-논산간 국도가 나성을 통과하는 지점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성 동문지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능산리 사지 남쪽 유수지에서 하천으로 이어지는 물길 즉, 추정 해자를 통과하여야 하는데, 이 지점에는 해자를 건너는 교량이 있었을 가능성이 극히 높다. 이들에 대한 금후의 조사가 기대된다. 그 밖에 성벽과 수비용 통로 사이의 평탄면에서 擔架등 목제품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구연부가 결실되었으나 나머지 부분은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토기 甕 1개체도 수습하였다. 4. 調査成果 및 意義 금번 동나성 발굴 조사를 통해 얻은 성과와 그 의의는 다음과 같다. 우선, 백제시대의 다양한 토목공법들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점을 들 수 있다. 지반이 연약한 저습지를 통과하는 금번 조사 지역에 적용된 고대공법은 2가지이다. 첫째, 枝葉敷設을 통해 연약지반의 기초를 안정하는 壓密浸下排水工法이다. 이 공법은 일본에서는 "敷粗朶(시키소다)"로 불리워지는 것으로 일찍이 백제에서 전해져 7세기 후반경 九州의 大宰府 水城 축조시에 처음으로 적용된 것이다. 금번 조사에서 그 근원이 되었던 백제 공법의 면모를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동나성 축조에 적용된 것은 水城 축조에서 드러난 공법과 달리 기초부분 뿐 아니라 上部 성토층에까지 매우 치밀하게 적용되고 있어 매우 발달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로써 이곳 동나성 축조에 채택된 공법이 지금까지 알려진 것 가운데 가장 발달된 형태이며, 그 축조 시점이 역시 6세기 전반경으로서 연대가 분명한 것 가운데서는 가장 이른 예로서 자료적 가치가 크다. 둘째, 성벽의 가장자리 부분에 말뚝을 박아 지하수면이 높은 기반토층의 습기를 상부 성토층으로 고르게 분산 배수시키는 이른바 "무리 말뚝"공법을 처음으로 확인한 점이다. 이 공법은 나무말뚝의 목질부가 가지고 있는 渗透性을 이용한 것으로, 현대공법인 paper drain 또는 sand drain 공법의 원형이라 할 수 있겠다. 이처럼 발달된 토목공법이 백제 당시에 이미 적용되고 있는 점은 백제 토목공법의 우수성을 웅변하고 있다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성벽 주변의 시설로서 垓字 흔적의 확인을 들 수 있다. 탐색갱의 토층조사에서 확인된 해자는 그 폭이 약 40m에 달한다. 동나성에 해자가 있음을 이번에 처음으로 확인함으로써 사비도성의 이해에 중요한 자료를 추가하게 되었다. 더불어 이를 통해 백제인들의 水文學的 예지를 동시에 엿볼 수 있게 된다. 이처럼 넓은 해자를 하천에 인접하여 배치한 까닭은 아마도 성벽축조로 인해 流路幅이 좁아짐으로써 유속이 빨라져 성벽에 가해지는 수압 상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배려가 담긴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즉, 홍수시 하천수가 많아져 성벽 통과부분에 가해지는 수압이 높아질 때 해자부분으로 물이 흘러들게 함으로써 유속을 현저히 감소시킬 수 있는 일종의 유수지 기능을 염두에 두었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성벽 안쪽에서 확인된 성벽과 평행한 枝葉敷設 通路遺構의 확인이다. 이 유구는 아직 정확한 기능을 알 수 없으나 금번 조사 구간이 교량으로 통과되었을 하천유로에 인접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상대적으로 방비가 취약한 교량 아래 부분을 잘 감시하기에 편리하도록 낮게 설치한 통로의 일부로 이해된다. 현재의 염창리방향 도로와 하천이 만나는 지점에 놓여 있는 교량과 거의 동일한 위치에는 당시 석재교량이 가설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이는 금번 조사지점 북단부에서 확인된 후대 수로 구축에 재활용된 잘 다듬어진 대형 석주 및 판석등으로 뒷받침된다. 나. 西羅城 서나성 발굴조사는 충남 부여군 부여읍 군수리 375-1답외 9필지의 1,948평에 대해 이루어졌다. 조사를 통해 인위적인 성토에 의해 축조된 나성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지만 현 제방하부에서 사비기 유물포함층과 우물지 1개소 그리고 溝狀遺構가 조사되었으며, 제방내부 지역에서는 역시 사비기에 해당하는 건물지와 水田이 확인 조사되었다. 1. 城壁 確認 調査 현재 부여 시가지의 서쪽과 남쪽 외곽에 해당하는 舊校里, 軍守里, 旺浦里 일대에는 금강의 범람에 대비한 인공제방이 축조되어 있다. 이 제방은 1950년을 전후로 하여 축조된 것으로, 부소산에서부터 시작되어 부여-논산을 잇는 국도까지 이어지다가 해발 13m 정도의 미고지성 구릉지가 형성되어 있는 군수리 성말부근의 약 1㎞ 구간은 인공제방이 축조되지 않고 다시 이 구릉이 끝나는 지점부터 필서봉 남쪽의 구릉까지 인공제방이 이어지고있다. 이번에 조사가 이루어진 부분은 군수리 성말과 신기정 마을 사이의 약 220m 구간에 해당되는데, 이곳은 인공제방이 축조되어 있는 범위내에 포함된다. 이 부분은 전술한 것처럼 서나성의 한부분으로 추정되어 현재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나 그 구체적인 양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이번 발굴조사는 비록 범위가 제한되어 있긴 하나 그간 추정뿐이었던 서나성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로서 이 부분 나성에 대한 구체적인 양상을 파악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1) 層位(도면 5, 사진 16·17) 우선 제방축조 이전의 舊地形 및 사비기 나성의 존재여부를 파악할 목적으로 조사구간내에 4개의 탐색갱(기술의 편의를 위해 남쪽부터 차례로 각각 제 1∼4트렌치로 명명함)을 설정하여 층위양상을 확인하였다. 제 1∼4 트렌치에서 관찰된 층위의 양상은 전반적으로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데, 대략 하부폭 16m, 높이 3∼4m의 규모로 축조된 현재의 제방토와 생토인 황갈색 고토양층 사이에는 30∼80㎝ 두께의 퇴적층만 확인될 뿐 나성과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여하한 인위 성토층도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생토층이 서쪽 즉, 강변 방향으로 다소 급하게 경사를 이루고 있는 점이 관찰되나 인공이 가해진 흔적은 역시 찾을 수 없었다. 퇴적층은 각 트렌치마다 두께나 퇴적 시점이 다른데, 제 1∼3트렌치 구간내에는 대략 두께 30㎝내외의 조선시대 이후 형성층만 분포하고 있는데 비해 조사구간 북단에 위치한 제 4트렌치에서는 30㎝두께의 조선시대층 아래에 사비기 백제층도 남아 있었다. 또한 제 4트렌치의 남벽면에서 후술할 백제시대 우물 축조시의 掘壙 윤곽의 일부도 확인되었다. 2) 우물(사진 17∼21) 우물은 원형의 구덩이를 약 3.5m가량 掘土한 후 그 내부 중앙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원형으로 쌓고 그 주변은 흙으로 다져서 만들었다. 우물의 직경은 약 60㎝ 가량으로 매우 좁은편이며 깊이는 3.5m에 달한다. 우물 외부에 굴토된 구덩이의 상부 직경은 약 4.5m이며 아래로 가면서 조금씩 좁아진다. 우물의 외부에 파진 구덩이의 북쪽변은 제방절개 제 4트렌치 절개시 약간 잘린 상태이다. 우물의 둘레에는 환형으로 3∼5㎝ 크기의 작은 강돌들이 각종 土器片 및 瓦片들과 함게 불룩하게 깔려있었다. 우물의 내부는 돌과 흙으로 완전히 메워진 상태였는데, 바닥에서부터 약 20㎝ 높이까지는 5∼7㎝의 작은 강돌이 채워져 있었고 그 위에 1개체의 토기(사진 31)편을 비롯한 약간의 토기 소편과 철정 하나가 폐기되어 있었으며 그 상부에는 20∼40㎝ 크기의 돌과 흙으로 채워져 있었다. 3) 구상유구(사진 21) 우물과 함께 제방절개 제 3∼4트렌치 구간에 대한 조사에서 확인된 것으로, 우물지와 동일한 면에 형성되어 있다. 구상유구의 진행 방향은 남동-북서 방향으로 제방의 진행 방향과 일치한다. 폭은 1.2m 정도로 거의 일정하며 깊이는 20∼30㎝가량 된다. 확인된 총 길이는 29m이나 북쪽으로 계속 진행되고 있다. 내부에는 적갈색 사질점토가 채워져 있었고 유물은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 그리고 구의 주변에서 우물 이외 별다른 遺構가 확인되지 않았다. 舊地表面이 우물과의 동일하므로 일단 泗 期 百濟遺構로 추정되나 그 성격을 자세히 알 수는 없었다. 2. 堤防 內部地域 調査(사진 22) 현 인공제방 내부지역에 대한 조사는 약 50m×80m 범위에 걸쳐 실시되었다. 조사 착수전 이곳은 모두 논으로 경작되고 있었다. 이 가운데 제방에 가까운 서쪽지점 약 30m 범위는 현재의 경작토 아래 전혀 퇴적층이 없는 채 곧바로 古土壤層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지금의 제방축조시 인접한 이 지점의 흙을 채토하여 성토하는 과정에서 원지형이 削平된 까닭으로 이해된다. 이 범위 밖의 동쪽지역에서는 사비기 백제의 道路遺構, 建物址群, 그리고 水田 등이 노출되어 조사되었다. 1) 層位 조사지점에서 드러난 建物址 및 耕作遺構들의 중복관계로 미루어 대략 선후 4 단계(Phase)의 고고학적 시기 설정이 가능하다. 제1단계는 주로 후술할 道路遺構 남쪽 지역에서 확인된 竪穴住居址들로 구성되는 시점으로서 금번 조사지역에서는 가장 이른 단계이다. 이 무렵 도로유구가 존재하였는지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없으나 이들 수혈주거지들의 평면분포상이 도로유구와 어느 정도 정합적인 점으로 보아 공존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리고 주변의 수전 역시 직접적인 공반관계를 뒷받침할 근거는 얻지 못하였으나 수전 지역이 주거지가 위치한 지점보다 낮은 低濕地라는 점에서 이 무렵부터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제2단계는 수혈주거지가 掘立柱建物로 대체되어 나타나는 단계이다. 柱穴들의 분포로 보아 東西방향으로 난 폭 5m의 도로유구 남쪽 지역이 하나의 구획으로 점유되었으며, 도로의 북편 구획에도 이와 또 다른 구획이 있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동쪽으로 연장되는 도로가 끝나는 지점 以東 지역에는 水路에 의해 대략적인 구획이 파악되는 水田이 있었다. 제3단계는 2단계의 굴립주건물 분포 구역 가운데 북쪽 구획의 일부 및 동서도로유구의 東端部, 그리고 수전 및 수로들을 東南-西北 방향으로 횡단하여 지나는 수로가 만들어지는 단계이다. 이 수로가 기존의 유구 배치를 무시하고 지나는 점으로 미루어 무언가의 큰 변화에 수반된 결과로 추정되는데, 수로 내부 퇴적토에서 출토되는 유물 가운데 사비기 백제 이후의 것은 없으므로 이의 굴착 및 매몰 완료시점이 아직 백제의 멸망 이전일 가능성이 높다. 제4단계는 앞의 1∼3단계 유구 가운데 상대적으로 저지대에 해당하는 동쪽부분이 완전히 퇴적토로 매몰된 이후 이곳을 밭으로 이용하던 단계이다(사진 28). 그 시점을 특정할 만한 유물은 거의 없으나 아마도 백제 멸망 이후의 統一新羅 무렵경으로 추정된다. 2) 道路遺構(도면 6, 사진 23) 조사지점의 중간부분에서 폭5m 가량의 동서방향 도로가 노출되었다. 路面은 敷石과 같은 특별한 시설이 없이 축조당시의 基盤土面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도로 양측에는 폭 30∼60㎝, 깊이 20∼30㎝ 가량의 側溝 흔적이 溝狀으로 있으나 그와 관련된 여하한 시설도 확인되지 않았다. 이와 같은 도로유구는 부소산 남쪽 기슭 추정 왕궁지 부근에서 이미 확인된 바 있거니와, 금번 도로의 방향이 추정 왕궁지 부근의 東西小路와 일치되고 있을 뿐 아니라 노폭 역시 그와 대차 없는 점으로 미루어 사비도내의 전반적인 도로망 계획과 관련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여기의 도로는 저지대를 횡단하여 도성내의 다른 도로망과 연결되었을 가능성은 없다. 조사지점에서 드러난 상황으로 볼 때 당시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微高地즉, 취락이 형성된 지점내에만 개설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로의 방향이 도성내의 기본 도로망 방향과 일치되도록 한 점이 매우 주목된다. 그러한 점에서 이것이 당시 사비도내 각 지점에 배치되었던 各部 및 巷의 공간구획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도로의 동쪽부분 즉, 저지대의 수전방향으로 이어지는 부분는 유적을 동남-서북 방향으로 크게 횡단하는 다음 시기의 수로에 의해서 파괴되어 자세하지 않으나 저지대의 수전 역시 당시 공존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으므로 당초 도로의 길이는 대략 20m 전후에 지나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3) 建物址(도면 6, 사진 22∼27) 상술한 동서방향의 도로 양편에는 남쪽에 주거지 등으로 추정되는 수혈유구와 굴립주건물지들이 중복되어 분포하고있다. 도로 북쪽 역시 도로와 접해서 남북방향에 맞추어진 주공열과 석렬이 확인되어 별도의 구획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이후에 형성된 수로에 의해 파괴되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도로 남쪽구획에서 확인되는 건물지 등의 유구들은 중복관계와 건물배치 양상으로 보아 서로 시기를 달리하는 두 개의 군으로 묶어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2기(S-1·2호)의 수혈주거지와 1기의 성격미상 수혈유구(S-3호)로 구성되며, 다른 하나는 수혈주거지인 S-2호의 폐기후 다시 그 위에 형성된 대벽건물지(S-4호)와 4∼5채의 굴립주건물 및 기타 유구들로 구성된다. 이들을 각각 1단계와 2단계로 구분하였다. 1단계의 S-1호와 S-2호는 모두 주거지로 추정되는데, 약 1.2m의 거리를 두고 인접해 있어 동시기에 공존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에 S-3호는 S-1호로부터 남쪽으로 약 7m가량 떨어져 있는데, 평면형태가 ' '자형을 이루고 있어(사진 26) 단순히 일반주거지로 보기에는 어려운 면이 있다. 따라서 이들은 1단계내에서 약간의 시기차를 가지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 선후관계를 알기는 어렵다. ' '자형의 평면형태중 동쪽 돌출부는 주변의 수혈 바닥면 보다 3㎝∼4㎝ 가량 깊게 굴토되어 있었는데, 벽체와 바닥은 불에 달구어져 소토화 되었고 그 내부는 목탄과 수개체의 토기편 및 철기가 20㎝×30㎝ 크기의 돌과 함께 집중적으로 채워져 있었다. S-1호와 S-3호의 사이 직경 7m 정도의 공간은 빈공터로 남겨져 있어 마당으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공간은 2단계까지도 계속해서 공터로 유지된다. 2단계가 되면 구획 외변에 구를 돌리고 목책을 세워 거주구획의 범위를 명확히 하고 있다. 구는 도로변을 따라 서에서 동으로 진행되다가 동쪽 약 20m지점에서 방향을 바꾸어 동쪽부를 구획하고 있다. 목책은 동쪽부의 구내부에서 직경 40㎝∼50㎝가량의 기둥이 1.5m∼1.8m의 간격으로 14m가량 확인된다. 구획은 1∼2기의 주거지, 창고 등의 부속건물로 추정되는 굴립주건물 4∼5기로 구성되는 보다 복잡한 건물배치를 이루며 공간 점유 면적도 확대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 단계의 중심 건물지는 구획의 북단 중심부에 위치한 S-4호로 규모와 구조면에서 차별성을 보인다. 직경 30㎝∼40㎝의 기둥을 연접해서 세워 벽을 형성하고 있는데, 남벽과 서벽은 구를 굴토한후 기둥을 세웠다. 북벽과 남벽은 주공열이 40㎝가량 이격되어 2중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건물의 增築 혹은 改修의 흔적으로 추측되지만 명확하지 않다. 남서쪽 모서리 부분에 수혈노지가 위치하고 있다. 구획의 서편에 치우쳐 남북방향으로 나란히 4기의 건물지가 확인된다. S-6∼9호로 명명된 것인데, 이중 S-8·9호는 중복되어 있는 것으로 거의 동일한 지점을 점유하고 있다. 모두 2평안팍의 소규모 굴립주건물로 창고 등의 부속건물로 추정된다. 이들은 서로 매우 인접한 상태여서 동시기에 한꺼번에 공존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심건물지인 S-4호의 동편에서도 1기의 굴립주건물(S-5호)의 존재가 추정된다. 이 건물은 규모나 구조면에서 전술한 서편의 굴립주건물들과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장변(남북) 5.0m, 단변 2.4m의 비교적 대형 장방형 건물이다. 양쪽 단변 중앙에 주공이 하나씩 밖으로 돌출되어 있는 특이한 구조이다. 이러한 주공배열은 일본  生時代나 古墳時代에 주로 神殿建物로 추정하는 역사다리꼴 형태의 지붕을 가진 건물로 복원되는데, 규모 등에서 차이를 보이며 기타 정황을 고려할 때 일본의 것과 동일시 하기는 어려워 그 기능을 판단하기 어렵다. 이 건물 주변부에는 다수의 주공이 불규칙하게 분포되어 있어 1∼2채의 건물이 더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나 구체적인 평면형 확인은 여렵다. 이상 살펴본 주요 유구의 규모 및 형태는【표 1】과 같다. 【표 1】住居區域內 主要 遺構 一覽 기타 남쪽구획의 중앙부에서는 직경 42㎝, 깊이 20㎝의 구덩이속에 회색연질 토기호 1점이 대옹편으로 추정되는 토기편으로 덮혀있는 것(사진 27)이 확인되었다. 아마도 토지신에 대한 제사행위와 관련된 '地鎭孔'으로 추정된다. 또한 S-4호 동편으로 약 2m 이격된 곳에는 방형의 소형 수혈유구가 있다. 이곳에서는 약 70㎝의 길이로 추정되는 원통형토기 1점이 출토되었는데 이제까지 출토예가 없는 특이한 형태로 특수용도에 사용되던 토기로 보인다. 도로 북쪽구획은 전술한 바와 같이 건물들이 폐기된 후 형성된 수로에 의해 구획의 동쪽 대부분이 파괴되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건물지와 관련된 것으로 판단되는 유구는 1열의 석렬과 2열의 목책열이 남아있다(도면 6, 사진 23). 석렬은 완만한 경사면상에 축조된 것으로 경사면을 단면 'ㄴ'자 형태로 정지한후 2단으로 쌓았다. 길이는 7m가량으로 도로와 직각을 이루고 있다. 柱孔열은 2열이 남아 있는데 그중 하나는 석렬 하부에서 주공의 굴광이 노출되어 석축과의 선후관계를 보인다. 4) 水田(도면 6, 사진 22) 상술한 건물지구역의 동쪽에 형성되어 있다. 원지형상의 微高地로부터 低濕地로 이어지 는 경사지를 이용하여 수전을 만든 것이다. 따라서 각 수전 구획은 경사도에 따라 대소의 차이를 보이며 형태 역시 등고선에 의해 결정됨으로써 부정형을 이루고 있다. 수전은 층위상으로 보아 1단계와 2단계 사이에 형성되어 이후 3단계이전까지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처음 토층상에서 일정한 두께로 수평면을 이루고 있는 산화철 또는 산화망간 집적층이 확인되어 식물규산체(Plant-opal)분석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수전층의 존재가 확인되었는데, 층위상으로는 수전면과 수로 등만이 인지될 뿐 논둑의 흔적은 찾을수 없었다. 평면조사를 통해서도 논둑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수로에 의해 대략적인 구획은 파악할 수 있었다. 북서에서 남동방향으로 흐르는 Ⅱ-1수로와 남서에서 북동으로 흐르는 Ⅱ-2수로가 대체로 주 용수로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으로 양자의 수로는 하나로 합쳐져 동쪽 저습지쪽으로 계속 흐르고 있다(도면 6). 이들 수로는 상술한 거주구획을 침범하지 않는 범위에서 명확히 분리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수로의 방향 또한 거주구획과 대체로 부합되고 있다. 논과 관련된 유물로는 목제삽 1점(사진 30)이 있는데, 이미 부식이 상당히 진행되어 상태은 매우 불량하다. 그 밖에 수전면 직상부의 퇴적토와 수로내부 충전토에서는 사비기에 해당하는 각종 토기편들이 출토되고 있다. 금번 발굴범위내에서 조사된 수전층은 그 동쪽으로 계속 연장되고 있는데, 본 발굴범위 동쪽으로 이어지는 도로 개설구간에 대한 시굴조사 결과에 따르면 현재의 제방 내부에도 매우 광범위하게 삼국시대 수전층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調査成果 및 意義 금번 서나성 발굴 조사를 통해 얻은 성과와 그 의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동안 서나성으로 추정되어 오던 인공제방부분에 대한 조사를 통해 그 양상을 확인할수 있었다는 점이다. 조사결과 1950년대 초에 축조된 인공제방과 생토인 황갈색 고토양층 사이에는 30∼80㎝ 두께의 퇴적층만 확인될 뿐 나성과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여하한 인위 성토층도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생토층이 서쪽 즉, 강변 방향으로 다소 급하게 경사를 이루고 있는 점이 관찰되나 인공이 가해진 흔적은 역시 찾을 수 없었다. 또한 조사구간중 북쪽일대에서는 현제방 하부에서 사비기 우물지와 그와 관련된 생활면이 확인되어 이곳에 인위적인 나성축조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다만 인공제방 하부의 사비기 舊地形을 추적해보면 당시에도 이곳이 금강변을 따라 형성된 微高地를 이루고 있어 금강이 범람할 경우 1차적인 자연 제방의 역할을 했을 것임은 분명하다. 둘째, 제방 내부조사를 통해 도로유구 및 건물지 구획과 수전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모두 사비기 일정기간동안 공존했던 것으로 사비도성내의 도시공간 구획과 관련하여 당시 나성주변 특히 나성 내부 지역의 토지활용 모습을 단편적이나마 살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도로의 방향과 폭이 부소산 남쪽 기슭 추정 왕궁지 부근에서 이미 확인된 바 있는 東西小路와 일치되도록 한 점이 매우 주목된다. 또한 도로의 (남북)양쪽에는 남북방향에 정연하게 배열되어 있는 건물지 및 그와 관련된 유구들이 구획으로 설정된 공간내에 배치되어 있는 양상이 확인되어 이것이 당시 사비도내 각 지점에 배치되었던 各部 및 巷의 공간구획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參考文獻】 九州歷史資料館 1994,「水城跡の調査」,『大宰府史跡』. 尹武炳 1976,「金提碧骨提 發掘報告」,『百濟硏究』7, 忠南大學校 百濟硏究所. 장주근 1974,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 경북편],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忠南大學校博物館 1997,『合德提 發掘調査 略報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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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서울시 풍납동 경당지구 유적 운영자 2364 2001.05.03
16 진천 교성리유적 운영자 2195 2001.05.03
>> 扶餘 東羅城·西羅城遺蹟 운영자 3063 2001.05.03
14 이성산성(二聖山城) 운영자 2689 2001.05.03
13 논산 정지리 백제 취락지 운영자 2461 2001.05.03
12 옥천 대천리 유적 운영자 2947 2001.05.03
11 김해 흥동 택지개발지구내 유적 운영자 2315 2001.05.03
10 고성 송학동고분군 운영자 2068 2001.05.03
9 밀양시 부북면 월산리(月山里)유적 운영자 2275 2001.05.03
8 오이도 뒷살막패총 운영자 3046 2001.05.03
7 제천 능강리유적 운영자 2387 2001.05.03
6 고성 송학동고분군(제1B-1호분) 운영자 3104 2001.05.03
5 三郞寺3길유적 운영자 3277 2001.05.03
4 대전 용호동 구석기유적 운영자 2975 2001.05.03
3 부여 염창리 백제고분군 운영자 2562 2001.05.03
2 보령 연지리유적 운영자 2299 2001.05.03
1 철원 장흥리유적 운영자 2739 2001.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