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
佳橋理陶器窯址
1999-11-30 00:00:00
조회 1150
V. 조사결과의 종합
본 가교리 통일신라 가마 유적은 충남 공주시 사곡면 가교
리 산 41-5번지에 위치하며, 공주시의 중심부에서 서북쪽으
로 약 18km의 거리에 위치한다. 유적은 가교리 마을 뒤쪽
에 있는 남동향 사면, 해발 약 145m지점에 위치하는 바 이
곳은 산의 중단까지는 밭으로 개간되어 있고, 그 하단에 마
을이 형성되어 있다. 요지가 위치한 곳은 경작지와 임야가
접하는 곳으로, 산사면의 중상단에 해당한다. 이곳은 통칭
마곡사 계곡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유적이 위치한 지역에
서 북으로 산등성이를 하나 넘으면 마곡사라는 고찰이 있
다. 더불어 이 지역은 일찍부터 온천개발부지로 예정되어
있었고, 본 조사지역도 마곡온천 개발지역으로 불린다.
개발에 앞서 지표조사가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지표면
에 소토 및 토기편의 산포가 확인되어 가마로 추정하였으
며, 정확한 유적현황 파악을 위해 시굴겸 발굴조사를 진행
한 것이다. 조사는 해당범위가 넓지 않기에 일단 시굴성 피
트 조사를 진행하였고, 가마 1기와 관련시설만이 확인되어
전면조사를 아울러 진행하여 조사를 마무리하였다.
확인된 유구는 소형의 요지 1기와 요지를 운영하면서 형성
된 폐기장 2지점 그리고 성격이 불분명한 불에 탄 유구 1
기 및 석축 유구가 있다. 더불어 요지를 운영하면서 남게
된 다량의 도기편이 수습되었는데 재질이나 기종면에서 매
우 단순한 것들이다.
요지는 조사구역의 북단구역에 위치한다. 산림지역에 인접
해 있는 경작지로, 산지와 개간된 경작지는 약간의 단을 이
루듯이 되어 있고, 그 사이에 민묘가 위치하며, 조사범위
의 모서리부분에서 연소실의 일부가 노출되었는데 소성실
은 조사범위에서 벗어나는 상단부에 위치한 민묘 쪽으로 해
발 141.2~143.4m에 해당한다. 요지는 경사방향에 맞추어 지
하로 조성된 것이고 연소실과 상면 지붕을 꾸몄던 석축이
일부 무너진 것 이외에는 요 전체가 잘 남아있다. 연소실
과 煙道를 잇는 요의 장축은 등고선 방향과 직교하는 북서-
남동(N-20도-W)방향으로 배치되었고, 지하식으로 경사면에
잇대어 만든 등요인데, 연소실에서 소성실까지 전체길이는
430cm이며, 소성실 최대 너비가 150cm정도의 소규모이다.
窯前部,연소실, 소성실, 연도부로 구분된다.
窯前部는 처음 요를 구축할 때 구릉사면을 굴착하면서 절개
된 掘坑부분으로 溝의 형태로 요지의 남쪽으로 장축방향과
일직선상에 위치시켜 길이 700cm, 너비 70cm로 단면이 [U]
자 형태로 파여져 있으며 최대깊이는 50cm정도이다. 이는
연소실 내부에서부터 시작되는데 형상으로 미루어 배수로서
의 기능도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구와 연소실이 연결되
는 부분에는 배수구형태의 석축시설이 있는데, 너비 10-
20cm정도로 파고 그 위에 20cm내외의 판석형 개석을 덮어놓
았다. 연소실은 길이 230cm, 잔존높이 90cm의 규모이다. 바
닥은 거의 편평하고 소성실, 요전부와 이어지는 부분이 약
간 좁아진 즉 연소실의 가운데가 최대의 너비를 지닌 편구
형의 형상이다. 연소실의 벽면은 비스듬히 밖으로 경사를
두면서 올려져 있는데 바닥에서 50cm의 높이에 20-30cm너비
의 단을 시설하고, 그 위에 1열의 석축이 남아 있는데 보
다 위쪽은 유실되어 상부구조가 정확하지는 않다. 연소실
의 바닥중앙에서 부터 너비 10cm가량의 구가 시설되어 이것
이 요전부까지 이어진다. 火門은 연소실과 소성실의 경계지
점에서 좌우의 양쪽 벽면에 돌을 세워 좁힘으로써 불길을
모아주는 역할을 한 것으로 판단되는데, 현재는 오른쪽 하
단에만 석재가 남아있다. 소성실과 연결되는 화문의 일부분
까지는 바닥면에 얇은 판석재를 부석하였다. 소성실은 연소
실과의 경계지점에서 일부 천장이 무너진 것 이외에는 거
의 원상태로 남아 있다. 천장에 인접한 곳은 비어 있는 것
으로 볼때, 폐기될 당시 내부는 일부가 비어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소성실의 바닥평면은 타원형이며, 길이 200cm,
최대너비 150cm, 높이 90cm이고 바닥면의 경사도는 24도
이다. 벽은 바닥면과 벽선이 만나는 변곡점부터 곡선을 이
루어 전체 단면은 반원형이고, 연도부에 연결된 부분은 단
면이 궁륭상이다. 바닥에는 소성실 북쪽 벽체에서 90cm정
도 떨어진 지점부터 연소실쪽으로 150cm가량 20×40cm의 판
석이 부석되어 있다. 소성실의 내부는 천장과 벽면이 높은
화도로 인해 유리질화 되었으나 균열이 심한 부분도 있다.
단면상에서 확인되는 불맞아 달구어진 부분은 10cm내외의
두께이다. 연소실에서 소성실로 이어지는 부분에 무단식으
로 바닥의 경사만 달리하고, 연소실의 화문부터 소성실의
3/1지점에 이르기까지는 너비 10-20cm의 판석형의 석재가
부석되어 있다. 연도부는 소성실의 북쪽 벽체의 상단 즉 천
장에서 돔형태로 너비를 좁혀서 만든 것이다. 연통의 직경
은 40cm이고 소성실 바닥에서 136cm, 천장에서 연도부 상면
까지의 길이는 46cm이다. 소성실의 가장 안쪽부분에서 약간
의 곡면을 이루며 축소되어 지상으로 비스듬하게 뚫려 있
다. 연도부 상면은 석재를 돌려 배치하였고, 그 위에 커다
란 도기의 바닥편을 덮었다.
한편 폐기장은 요지와 관련된 것으로 요지의 하단쪽에 지름
이 550cm정도의 범위로 부정형한 원형의 평면을 지닌채, 불
탄 흙과 재, 그리고 토기편이 뒤섞인 형태로 노출된 것이
제1폐기장이고, 2호 폐기장은 조사도니 요의 좌측에 위치하
며 요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 2호 폐기장
은 남-북을 장축으로 길이가 400cm정도의 범위로 남았고,
동-서 간의 너비는 270cm로 전체적 평면이 타원형이다.
이외에 불땐 유구는 조사지역의 중간에서 약간 서쪽으로 치
우친 구역인 지형적으로 골짜기 형상의 지형에 있으며, 평
면형태는 T자형으로 장축이 N-26도-E이고 길이는 240cm인
데 너비는 넓은 곳이 180cm, 좁은 곳이 110cm이다. 측면의
가장자리에 점토를 덧발라 가열하면서 형성된 소토가 쌓여
있는 상태였다. 소토층 아래에 앞에서 언급한 아궁이 화문
형상의 2열 석렬이 50cm 폭으로 있다. 그 가운데에 목탄이
비교적 양호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적석 유구는 폐기장 2
에서 경사면 위쪽인 북방에 자리한 것으로 4m정도의 거리
에 위치하나 등고선 방향과 나란하게 2m의 길이에 경사방향
에 따라 1m의 너비로 부석형태만 확인될 뿐이다.
수습된 유물은 도기편 이외의 것은 전혀 없으며, 도기편들
도 기종이나 내용에서 매우 단순함을 보인다. 다만 일부는
와질성이면서 적갈색조의 것도 있으나, 요를 운영하면서 초
벌구이 후에 폐기된 것에 불과하다. 전체적으로 소성도가
매우 높아 그릇의 표면에 대부분 자연유가 형성되어 있으
며, 기종은 복원되는 것이 없어 자세하지 않지만, 굽 있는
항아리라던가 장경호 혹은 작은 발형의 기종, 그리고 병형
기종 등이 확인된다. 표면에 원점문이 시문된 것도 일부 확
인된다.
가교리 요지는 그 조성시기가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 후반
의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절대년대를 추정할 수 있는 시
료가 있지만 그 결과는 아직 확인할 수 없는데, 우선 수습
된 유물로 미루어 그렇게 추정한다. 즉 수습된 도기편들은
시기적 편차가 크지 않으면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 형상
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 기종에서 구연의 발달정도나 문
양, 그리고 굽의 형상에서 당시의 토기 중에서는 비교적 발
달된 형상을 보이면서 일부 병형의 기종에서 오히려 고려시
대의 토기병 형상의 것도 있음에서 일단 통일신라시대에서
비교적 늦은 시기의 것으로 판단한다.
한편 통일신라시대의 유적으로 이 가교리 요지의 의미는 적
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금강유역의 대부분 유적이 백제
시대에 초점되어 있고, 상대적으로 영세성을 면치 못하였
던 통일신라시대의 유적이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나아가 생
활유적과 밀접한 관련을 보이는 요지가 확인되었다는 점에
서 그러하다. 사실 충남 공주지역은 백제이후 신라의 중앙
정부에서 매우 중시한 지역이라는 것은 이 지역에 웅천주
의 치소를 마련하고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시기 유적은 백제 유적과 겹쳐 있는 공산성 유적, 정지
산 유적, 그리고 일부 보통골 고분군 등의 분묘 유적 등에
국한되어 그 상대적 열악상이 두드러진 상태였다. 물론 이
러한 유적의 형성에 대한 배경은 조사의 미비에 기인한 바
가 많을 것이다.
가교리 유적 조사의 또 다른 의미는 통일신라 요지의 형상
을 확인하면서 다양한 요지 내용을 확인하였다는 것이다.
즉 가교리 요지가 소성실과 연소실간에 무단식으로 이루어
졌다든가, 요전부에 구가 시설되면서 연소실의 바닥에서 구
까지 바닥에 부석이 이루어진 것은 이 시기 요의 내용으로
서는 비교적 주목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동형의 요가 신
라지역에서 확인되지만 중서부 지역에서는 다소 이례적인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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