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소식
밀양금천리유적현장설명회자료
2003-06-26 16: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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密陽 琴川里遺蹟
Ⅰ. 調査槪要
유적이 위치하는 곳은 대구-부산간 고속도로 부지 가운데 제 7공구에
해당하는 곳으로, 북밀양 I·C가 건설될 예정이다. 발굴조사는 2001년
12월 24일부터 2003년 5월까지 약 1년 6개월동안 실시되었다. 조사결
과 신석기시대 後·晩期에 해당하는 주거지 2기, 야외노지 2기, 적석유
구 2기와 무문토기시대 주거지 8기, 고상가옥 7동, 大壁建物과 地上式
건물, 水田, 밭, 濕地와 수리시설 등 다양한 유구가 확인되었다.
이번 조사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1.유적위치 : 경남 밀양시 산외면 금천리 620-2번지 외
2.조사기간 : 2001년 12월 24일∼2003년 6월 20일 현재
3.조사면적 : 5,000여평
4.조사기관 : 경남대학교박물관(관장 유장근, 조사책임자 이상길)
5.의뢰기관 : 대구-부산간 고속도로 주식회사
Ⅱ. 遺蹟의 立地와 環境
밀양시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琴川里는 密陽江과 東川(또는 丹場川)
이 合流하는 곳에 形成된 汎濫原에 자리잡고 있다. 경주 斷石山에서 발
원한 밀양강은 유천 부근에서 청도천과 합류하며, 남쪽에서 다시 동부
산지에서 흘러오는 東川(丹場川)과 합류하여 삼랑진 근처에서 낙동강
으로 유입된다. 특히 동천 유역에는 북동부 산지에서 공급된 퇴적물로
인해 매우 넓은 沖積平野가 발달되었는데, 이 유적이 위치하는 소
위 '거문고들' 역시 이러한 충적평야 가운데 하나이다. 密陽江으로 流
入되는 東川의 堆積作用에 의해 形成된 범람원 가운데에서 상대적으
로 높은 自然提防上에 遺蹟이 위치하고 있다. 東川은 密陽江보다 規模
가 작으므로 홍수시 密陽江으로 流入되지 못하고 범람하는 경우가 많
고, 잦은 범람으로 인해 충적평야가 發達하였다. 현재의 河川은 流路變
更을 거듭하여 지금의 流路가 確定된 것으로 생각된다. 유적이 입지하
고 있는 沖積地에는 4-5개 정도의 自然提防이 겹을 이루면서 形成되어
있는데, 현재 조사가 진행중인 곳은 가장 북쪽에 위치하는 自然提防이
다. 자연제방은 자체구역 내에서도 미세한 고도 차이가 확인되며, 그
가운데 상대적으로 높은 2개소에 주거지가 밀집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
다. 그리고 그 自然提防 배후에 발달한 濕地는 과거에 河川이었던 것
이 濕地化한 것으로, 그 규모가 비교적 큰 편이다. 자연제방과 濕地 사
이의 空間에는 水田이 조성되어 있다.
Ⅲ. 調査內容
1. 층위
발굴조사에 착수한 후 조사지역 전체에 걸쳐 6개의 대형 트렌치를 새
로 넣어 유적 전체의 기본 층위를 파악하는 작업부터 시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2개의 無文土器時代 문화층과 1개의 新石器時代 문화층을 확
인하였다.
이 유적은 현재의 耕作層에서부터 基盤層인 礫層에 이르기까지 모두
16개의 기본 층위로 이루어져 있다.(주거지역, 水田, 습지 등 3개소는
각기 층위가 다름) 1∼7층은 모두 삼국 또는 고려시대 이후의 반복된
경작층으로, 산화철과 망간이 다량으로 집적되어 있다. 각 층은 미세하
게 구분하기가 곤란하며, 정확한 연대도 파악하기가 어렵다.
8∼10층은 無文土器時代層이다. 8층(두께 25㎝ 정도)에서는 유구가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고 부분적으로 무문토기편이 포함되어 있다.
조사된 1기의 송국리형 주거지가 이 층에서부터 형성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된다. 10층(두께 30㎝)은 현재 조사하고 있는 無文土器時
代 初期의 層으로, 주거지·고상가옥·수혈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水田
面 역시 이 층과 동일한 층으로 판단된다. 그 사이에 있는 9층은 홍수
에 의해 일시적으로 퇴적된 갈색 砂質土層으로, 無文土器時代의 上層
과(8층) 下層(10층)을 구분하는 間層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층은 濕地
를 제외한 유적 全面을 덮고 있으며, 주거지와 논이 同時期임을 입증
해 주는 증거가 되는 층이다. 11·12층은 新石器時代層으로, 주거지·야
외노지·토기 등 관련유구나 유물이 포함되어 있다. 이 층은 유적의 서
쪽 1/2 정도 범위에 한정되어 있는 것 같다. 13층부터 그 이하는 모래
혹은 굵은 모래가 섞인 자갈로 이루어진 층인데, 地下水位 변동의 영향
을 받는 층이다. 유적 전체의 기반층은 하천의 퇴적에 의해 형성된 礫
層이다.
한편, 濕地는 土炭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층위가 뚜렷하지 않아
구분이 곤란하나, 유기물 함유량의 多寡(包含層-間層)를 기본으로 하
여 크게 세 시기로 나누었다. 이 층은 각기 '無文土器時代 初期의 住居
址·水田-下, 松菊里型 住居址-中, 後期無文土器(三角口緣粘土帶土器)-
上'으로 대응되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2. 유구
1).新石器時代
① 住居址
試掘 12트렌치의 북쪽 끝 서편의 1기와 9호 주거지, 총 2기가 조사되
었다. 현재 조사중인 10층 面에서 확인된 것인데, 爐址의 레벨이 높다.
평면형태는 방형으로, 길이와 폭은 각 8m이다. 중앙부분에 爐址가 있
으며, 북쪽에 폭이 좁은 段이 있는 것 같다. 爐址는 납작한 川石을 비스
듬히 세워서 원형으로 돌리고 주위를 점토로 보강하였다. 직경은 80㎝
정도이다. 爐址에 인접한 서쪽에서 빗살무늬토기 1점이 출토되었는데,
저부와 동체는 조금 떨어져 있었다. 그 외에 주거지 내부에서 다수의
토기편과 숫돌편이 출토되었다. 주거지가 확인되는 면의 레벨이 동시
기의 다른 유구보다 높은 편이다.
9호 주거지 역시 빗살무늬토기 시기의 전통을 가진 주거지로 판단된
다. 爐址의 평면 형태가 원형이며, 川石을 비스듬히 세워서 돌린 점, 爐
址의 외곽을 점토로 보강한 점, 무문토기 초기 주거지인 8호 주거지와
의 중복관계 등이 그것이다. 이 주거지 역시 무문토기 초기의 주거지
와 거의 같은 면에서 확인되며, 爐址의 레벨이 높다. 내부에 석기편 등
다량의 석재가 가득 차 있는 것으로 보아 석기제작 등의 특수한 용도
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②野外爐址
試掘 17트렌치의 중앙과 북쪽 끝에서 확인되었다. 북쪽의 것은 직경
1.7m 가량의 원형 수혈 내에 불에 달구어진 돌과 숯, 재, 토기편 등이
가득 채워져 있다. 내부의 돌은 川石이 대부분인데, 모두 깨어진 것들
이다. 일반적인 新石器時代 野外爐址와 비슷하다. 이곳에서 직접 調理
를 하였는지, 혹은 조리를 위해 돌을 달구는 곳이었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내부의 흙을 채취하여 분석할 계획이다. 이 외에 규모가 작
은 爐址도 트렌치에서 확인되었는데, 주거지 내부의 시설인지 혹은 독
립된 野外爐址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③積石遺構
유적의 거의 중앙에 위치하는 것으로, 自然堤防의 북쪽 高所에 위치
한다. 50㎝ 내외의 큰 川石을 쌓아올린 것으로, 평면 형태가 원형에 가
까운 2개의 積石이 남북으로 맞붙어 있다. 직경은 각각 5m 정도이나 북
쪽의 것이 조금 더 크다. 積石에 이용된 돌은 주위의 하천에서 쉽게 구
할 수 있는 것들이다. 돌 중에는 깨어진 것이 많으며, 불도 달구어진 것
도 다수 관찰된다. 불에 달구어진 돌은 집중되어 있지 않고 산발적이
며, 불을 맞은 위치나 방향도 제각기 다르다. 이런 점으로 보아 이 자리
에서 불에 달구어진 것이 아니라 옮겨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깨어진 돌
도 많이 보이는데, 돌의 크기나 깨어진 상태로 보아 인위적인 것으로
판단된다. 돌 틈에서는 빗살무늬토기편을 비롯하여 보습, 石器剝片, 石
材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북쪽의 적석 하부에서는 소토와 목탄
이 확인되었다. 이 유구는 無文土器時代 초기의 주거지보다 아래층(11
층?)에서 쌓여진 것이며, 출토되는 토기도 모두 新石器時代 後·晩期의
것들이다.
적석유구의 성격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돌의 상태나 하부의 소
토와 목탄의 존재, 유물 출토상태 등 여러 정황으로 보아 당시의 信仰
혹은 儀禮와 관련이 깊을 것 같다.
④年代
이 유적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는 中期로 編年되는 일부 片을 제외
하고는 대부분 後·晩期의 것들이다. 이 토기는 최초의 무문토기가 이
지역에 유입되는 시기에 있었던 在地 土器로, 빗살무늬토기의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고는 있으나 거의 退化되어 末期的인 樣相을 보이고 있
다. 이 토기들은 새로 들어온 무문토기와 일정기간 混在·共存하였던 것
으로 판단되며, 無文土器時代에 돌입한 이후의 빗살무늬토기도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점은 주거지나 노지의 형태에서도 그대로 반
영되어 나타난다.
2).無文土器時代
無文土器時代의 유구는 1기의 松菊里型 주거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初
期의 것이다. 주거지, 高床家屋, 大壁建物, 竪穴, 水田과 水路 등이 모
두 이 시기의 것이다. 주거지의 중복 등을 고려한다면 모든 유구가 同
時에 공존한 것으로 볼 수는 없지만, 대체로 비슷한 시기로 보아도 좋
을 것 같다.
①住居址
無文土器時代 初期의 주거지는 모두 8기가 조사되었다. 북쪽 高所의
자갈층 위에도 주거지가 여러 기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土深이 얕
아 형태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었다. 평면 형태는 長方形과 方形이
있는데, 7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장방형이다. 장방형의 경우 길이
10m 폭 5m 내외가 일반적이나 1호는 이것보다 규모가 크다.(11×8m)
특히 1호의 長壁 쪽은 중앙보다 30㎝가량 낮게 패여져 있으며, 그 속에
서 유물이 출토되는 특이한 구조이다. 트렌치에서 단면이 먼저 확인됨
으로써 깊이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8호 주거지를 참고할 때, 이 시기
주거지의 깊이는 30㎝ 내외가 보통이었던 것 같다.
주거지 내에는 납작한 川石을 수직으로 세운 방형의 圍石式 爐址 1기
씩이 있다. 방형 주거지에서는 중앙에, 장방형 주거지의 경우는 중앙에
서 한쪽으로 치우친 곳에 위치한다. 爐址의 바닥에는 돌을 깔지 않고
점토로써 다졌다. 1호 주거지에서는 爐址가 확인되지 않았고, 6호 주거
지의 爐址는 돌을 돌리지 않았다.
집의 구조가 움집과 같은 완전한 竪穴式은 아니었겠지만, 내부에서
柱穴이나 礎石이 확인된 예는 없다. 주거지의 크기를 고려할 때 매우
크고 견고한 기둥이 요구됨은 당연하다. 따라서 礎板과 같은 시설을 상
정해 볼 수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8호 주거지에서는 수직으로 세워진
板子壁 일부와, 불에 타서 넘어진 壁體가 출토되었다. 다른 주거지에서
는 補强土가 남아 있거나, 수혈 벽을 따라서 燒土가 길게 이어져 있는
예가 있었다. 이런 점으로 보아 벽은 대부분 板子를 세워서 만들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주거지 내에서 출토되는 유물의 수는 많지 않으며, 특히 석기는 石斧
나 石鑿(2·6·8호), 石刀(1·3호), 石鏃(7·8호) 정도로 빈약한 편이다. 7호
주거지에서 출토된 따비형 석기는 예가 드문 특이한 것이어서 주목된
다. 토기는 대부분 片으로만 출토되었으나 3호 주거지에서는 完形의 무
늬없는 二重口緣土器가 거꾸로 박힌 상태로 출토되었다. 북쪽 高所의
자갈층이 노출된 곳에서는 二重口緣+지그재그 短斜線+口脣刻目이 있
는 대형토기가 거꾸로 박힌 채 노출되었다. 주거지 내부의 저장시설이
었던 것 같다. 무문토기는 폭이 넓은 二重口緣에 孔列, 口脣刻目, 孔列+
口脣刻目이 있는 口緣部片이 대부분이다. 무문토기 주거지에서 빗살무
늬토기편이 출토되는 예도 있다. 주거지의 대부분이 전혀 교란되지 않
고 완전한 상태에서 조사된 것을 고려한다면, 유물의 수가 매우 적은
편이다.
②高床家屋
高床의 건물지 가운데 형태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7동이다.(7호
는 地上式 건물로 命名함.) 이 가운데 8호를 제외한 6기는 모두 自然堤
防 위에서 가장 높은 남쪽 高所에 동-서의 列狀으로 위치하고 있다. 기
둥의 배열은 4×3間(2·3·6호), 3×3間(1·4호), 3×2間(5·8호) 등 다양하
다. 이 중에서 2·3호와 4·5호는 중복관계를 이룬다. 평면상 사다리와 같
은 출입 시설을 설치한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2·3호의 경우 먼저 구덩이를 파고 바닥에 점토를 깐 후, 기둥을 세우
고 다시 기둥 주위를 점토로 보강하였다. 기둥구멍의 깊이는 20㎝ 내
외, 기둥구멍의 직경은 40㎝ 내외, 기둥의 직경은 20㎝ 내외이다. 대부
분의 柱穴 바닥에는 별도의 시설이 없었으나 2호의 기둥 1개에서는 구
덩이의 바닥에 점토를 깐 후 다시 납작한 돌을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올
렸다.
이 건물지의 시기를 알 수 있는 근거는 없다. 기둥구멍 내에서 무문토
기 편이 출토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특징이 없어 시기를 파악할
만한 자료는 되지 않았다. 다만, 間層인 9층을 제거하면서 주거지 등의
유구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검출된 것으로 보아 주거지와 동일면에 조
성되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들 건물지를 無文土器時代 初
期의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③大壁建物, 地上式 建物
우리가 大壁建物과 地上式 建物로 부르는 시설물은 이 시기의 다른
유적에서 발견된 예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 용도(기능)가 분명하지 않
으므로 일단은 이런 이름으로 命名하였다.
大壁建物은 크고 작은 구덩이를 줄지어 파서 壁體를 세운 地上式의
건물이다. 壁體가 두터운 부분에는 2列의 柱穴이 있으며, 壁體의 폭은
80㎝이다. 내부의 중앙 좌우에도 서로 마주보는 2개의 柱穴이 있는데,
이 기둥은 지붕을 받치기 위한 것이라 판단된다. 건물의 전체 크기는
길이 8m 폭 5m의 장방형이다. 이 건물의 용도는 분명하지 않으나, 동시
기의 주거, 창고와는 다른 기능을 가졌을 것이다. 추측컨대, 이러한 형
태의 시설은 동물의 우리로 사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시기는 高床倉庫
와 마찬가지의 이유로, 無文土器時代 初期로 판단하고 있다. 柱穴 내부
에서 무문토기편이 출토된 예가 있다.
地上式 建物은 작은 기둥을 일렬로 세워서 벽으로 이용한 細長方形
의 건물이다. 중앙을 따라 서도 기둥구멍이 확인된다. 기본적으로는 大
壁建物과 유사하나, 壁體를 이루는 주혈의 수가 적고 크기도 작다. 길
이 16m 폭 4m로, 매우 좁고 긴 건물이다. 중간에 해당되는 8m 위치에
장축방향과 直交되게 3개의 柱穴이 양쪽에서 확인되었다. 칸막이와 같
은 시설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地上式 建物은 4·7호 주거지와 중복되어 있는데, 4호 주거지 埋沒
土에서 柱穴이 확인되는 점으로 보아 4호 주거지보다 늦게 만들어졌
다. 7호 주거지와의 관계는 분명하지 않다. 7호 주거지를 조사하는 과
정에서는 이 건물에 대한 認識이 없었기 때문에, 주거지 내부 埋沒土에
서의 柱穴 존재 여부를 파악하지 않았다. 따라서 7호 주거지 내부 埋沒
土 중에 柱穴이 있었을 수도 있고, 혹은 처음부터 없었기 때문에 認知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결국 이 건물지는 4·7호 주거지보다 늦게 축조
되었거나, 혹은 4호 주거지→지상식 건물지→7호 주거지의 順으로 축
조되었을 수도 있다. 柱穴 내부에서 무문토기편이 출토된 예가 있다.
④水田과 水路
自然堤防의 북쪽 高所에서 背後濕地로 이어지는 완만한 斜面에 水田
이 조성되어 있다. 水田層은 無文土器時代 上·下層의 間層인 9층에 의
해 被覆되어 있었다. 따라서 현재의 調査面인 10층과 동일한 층으로 판
단하고 있으며, 층위상으로도 그대로 연결된다. 水田層 아래에는 산화
철집적층, 망간집적층이 형성되어 있어 단면에서 전형적인 水田 양상
을 보인다. 그 외에도 異質土의 混入 양상이나 土色, 논둑의 존재 등 여
러 점에서 水田層으로 판단되었다.
水田의 下層은 背後濕地 以前의 濕地였으므로, 이곳은 水田이 조성되
기에 적절한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下層 濕地의 남쪽 외곽은 水田의
경계와 거의 일치하며, 住居地域과 水田을 구분하는 지점에 대형 둑
(이 둑을 편의상 경계둑이라 命名한다.)이 있어 下層에서의 이질적인
토양조건의 경계가 된다.(주거지역의 下層은 자갈층임.) 폭 50㎝ 내외
의 경계둑은 조사범위의 동쪽에서 시작되며, 습지와 경계둑 사이의 공
간은 긴 삼각형을 이룬다. 따라서 水田이 조성된 면적은 서쪽으로 갈수
록 점차 넓어진다. 이 범위 내에서 모두 70面 이상의 水田이 조사되었
는데, 단위 면적은 5∼6평 정도가 보통이다.
水田은 폭 15∼20㎝ 가량의 둑으로 구획되어 있으며, 논둑은 全面을
평면으로 除土하는 과정에서 肉眼으로 식별이 가능하였다. 평면 형태
는 長方形이 주류이나, 평면 형태가 다소 일그러지거나 논둑이 굴곡을
보이는 것은 微地形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意圖로 판단된다. 논둑의
높이는 3∼5㎝ 내외이며 단면 형태는 末角의 梯形이다. 논둑은 十字
가 아닌, χ字狀으로 교차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水田에서는 2개의 水路가 확인되었다. 水路(1)은 경계둑과 나란하게
동-서로 개설되어 있으며, 水路(2)는 水田地域의 중앙 부분을 동-서 방
향으로 관통하고 있다. 舊 河川이 흘렀던 방향이 東→西이므로, 取水口
는 水路가 濕地와 만나는 동쪽 끝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현재 조사된 水田보다 약간 늦은 시기의 것으로 판단되는 洑 시설이 水
路(1)의 끝에 해당되는 濕地 속에서 노출된 점으로 보아 이곳에 取水口
가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경계둑이 최초에 노출될 당시, 경계둑 위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돌이
세워져 있었다.(물론 이 중의 일부는 除土 과정에서 제거되었을 것이
다.) 확인 결과 돌이 서 있는 부분의 경계둑이 모두 끊어져 있어, 이곳
을 통해 水路(1)의 물이 논으로 流入됨을 알 수 있었다. 이 돌은 水口
의 물막이 겸 標識였던 것이다. 水田과 水田 사이의 논둑에서 水口가
확인된 예는 적다. 이는 논둑이 χ字狀으로 교차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고 판단된다. 즉, 논의 물이 χ字의 좁은 곳을 넘어서 다른 논으로 흘러
들어 가는 것이다.
水田의 북쪽 끝은 高麗時代 또는 그 이후 水路의 개설로 인해 잘려나
갔다.
⑤밭(田)
조사지역의 동쪽의 Ⅰ·Ⅴ트렌치 단면에서 밭고랑으로 판단되는 굴곡
을 확인하였다. 그러한 波狀의 굴곡은 자연 상태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이 밭이라 판단하고 평면에서 유구확인 작업을 하였으
나, 그 흔적이 워낙 애매하고 흐트러져 있어 형태를 파악하기가 곤란하
였다. 분명히 밭이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평면에서 형태를 파악하지 못
하였으므로, 분포 범위만 확인해 둔다.
3).濕地와 水理施設
조사범위의 가장 북쪽에는 濕地가 넓게 형성되어 있다. 이 濕地는 본
래 하천이었던 것 같으나 濕地로 변하였다. 濕地 내부는 완전히 土炭化
되어 많은 유기물이 포함되어 있다. 自然堤防 위에서 생활했던 선사시
대 사람들에게 이 河川(濕地)은 매우 유용한 것이었다.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이용되는 물은 멀리 남쪽을 흐르는 東川이 아니라, 자연
제방 뒤쪽을 흐르는 작은 하천이었다. 따라서 이 하천에는 사람의 생활
과 관련된 많은 흔적이 남아 있다.
당시의 사람들이 하천을 이용한 가장 적극적인 증거는 洑 시설이다.
灌漑施設의 설치 없이 水田 耕作은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논둑으로 區
劃된 水田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곧 水理施設을 갖추고 있었음을 의미
한다. 불행하게도 지금까지의 水田에서 水理體系를 논할 만한 유적은
많지 않았다. 당연히 있었던 것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유적에서
濕地를 조사하여 洑 시설을 확인한 것은 유적 조사의 범위를 확대시킬
필요가 있음을 말해준다. 특히 洑의 존재는 水田에서 평면상 확인된 溝
가 확실하게 水路로써 기능하였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 외에도 洑를 구성하는 각종의 部材에는 人工이 가해져 있으므로,
기술적인 측면에서 洑의 축조나 목재의 가공 등에 대한 검토도 요구된
다. 직경 70㎝ 이상의 참나무를 2,500년 동안 고스란히 간직하는 것도
濕地의 힘이다.
Ⅳ. 調査結果 및 遺蹟의 意義
이 유적은 新石器時代부터 無文土器時代 後期까지의 생활유적이다.
이 중에서 특히 무문토기시대 초기가 중심이며, 신석기시대 말기에서
무문토기시대 초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의 과도적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 무문토기시대 유적의 조사는 구릉을 중심으로 진행되
어 왔으며, 충적지의 조사 부족으로 인해 당시 생활에 대한 다양한 정
보를 얻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무문토기시대 취락의 입지가 前期
의 구릉에서 中期 이후 농경이 본격화되면서 低地로 이행하였다고 본
견해도 있었다. 이번 금천리유적의 조사는 충적지에 형성된 자연제방
과 배후습지가 그 대상으로, 무문토기시대 초기의 사람들이 주어진 환
경을 어떻게 이용하고 살았는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조사
결과를 정리하면서 이 유적이 가지는 의의와 문제점을 살펴보면 다음
과 같다.
1)南海岸地域 新石器文化의 展開 루트를 확인할 수 있는 계기를 놓치
고 있다.
밀양은 洛東江의 중·하류에 해당되는 내륙에서 최초로 신석기유적이
발견된 곳이다. 최근, 금천리유적을 비롯하여 살내, 신안, 청도 오진리
등 밀양의 각지에서 신석기시대 前期∼後期에 걸치는 생활유적이 확인
되고 있다. 洛東江中流域의 신석기시대 유적은 남부 해안지방의 신석
기문화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를 포함하고 있
다. 또한 貝塚이 아닌 聚落을 조사함으로써 다양한 문화 양상을 파악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점에서 금천리유적 신석기시대 문화층 조사는 중
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본 발굴단은 신석기시대 문화층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를 진행하지 못하였다. 단면에서 문화층 또는 주거지가 있음을 확
실하게 확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정이 용납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1∼2기의 주거지와 일부 채집유물로는 산적한 문제들을 풀기
에 부족하다. 生活面에 대한 전면 조사의 필요성은 인정되나 이의 실현
은 요원하다.
2)水理體系를 갖춘 한반도 最古의 水田이다.
이 유적은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조사된 水田 가운데 그 연대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지금까지의 水田은 구릉을 낀 開析谷에 立地하고 있
어, '구릉상의 주거-저지대의 수전'이라는 조건이었다. 따라서 주거지
와 수전의 同時性을 입증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없지 않았다.
이에 반해 금천리유적은 충적지에 입지하면서 주거지와 수전이 층위상
으로 연결되고 있어 수전의 시기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가 있었다. 특
히 금천리유적의 수전은 2개의 水路를 갖추고 있으며, 동시기 여부는
아직 분명하지 않으나 하천으로부터 수로로 물을 끌어들이는 洑 시설
도 함께 출토되었다. 洑를 포함한 取水口는 수전유적에서 당연히 예상
되는 水理施設이지만, 이 유적과 같이 습지화된 하천을 조사하지 않으
면 검출이 가능하지 않으므로 선사시대의 洑 시설로 알려진 예는 거의
없다.(*洑의 연대와 구조에 대해서는 추후 자세하게 검토할 예정이
다.) 더구나 水路로부터 논으로 유입되는 水口까지 정연하게 확인되
어, 水田과 水理體系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가 확보되었다. 금천리유
적의 수전은 정연한 수리체계를 완비한 最古의 수전으로, 한반도에서
無文土器時代 初期에 이미 이러한 완전한 구조의 수전이 경영되고 있
었다.
3)先史時代 사람들이 沖積地와 그 주변의 지형적, 환경적인 여건을
어떻게 이용하였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확보되었다.-유적 개념
의 확대
地形上 이 유적은 自然堤防과 背後濕地이다. 자연제방에도 상대적으
로 높은 곳과 낮은 곳이 있다. 無文土器時代의 초기부터 高所에는 주거
지와 창고를 배치하고, 낮은 곳은 밭, 습지 가까이는 논으로 이용하였
다. 논에 자연스럽게(자동적으로) 물을 대기 위해 濕地에 말뚝을 박아
洑를 설치하였다. 습지의 가장자리에는 나무를 이용한 시설물을 만들
어 물에 접근하기에 용이하도록 하였다.(낚시터와 유사) 이러한 일련
의 행위는 당시의 사람들이 미세한 지형 변화를 잘 이해하고, 거기에
적절하게 대응하면서 생활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4)3,000년 전의 씨앗, 곤충, 나무 등 각종의 유기물이 다량으로 출토
됨으로써 당시의 生態 環境을 복원할 수가 있게 되었다.
이 유적의 습지는 범위가 매우 넓을 뿐 아니라 많은 유기물을 포함하
고 있다. 고고학적인 입장에서는 습지가 유적과 무관하다고 보는 견해
가 많다. 그러나 자연의 유물도 넓은 의미에서 인간 생활과 밀접한 관
련을 가진다. 더구나 금천리유적의 습지는 인공이 가미되어 있어 단순
한 자연물로 취급할 수 없다. 특히 습지에서 출토된 대형의 통나무는
시설물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 자체로도 훌륭한 유물이다. 다양한 곤충
과 수많은 열매, 씨앗, 식물은 말 그대로 자연학습장이자 보고이다. 다
만, 이것을 어떻게 수습하고 분석하여 효과적으로 연구할 수 있을 것인
가 하는 점은 향후의 과제이다.
5)農耕社會의 初期부터 高床式의 倉庫가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
다.
高床의 건물지를 창고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농경사회에 들
어서면서 잉여의 생산물과 다양한 도구들을 저장, 보관하는 시설인 창
고는 반드시 필요하다. 농경사회에 진입한 무문토기인들은 당연히 그
러한 시설을 사용하였겠지만, 유적에서 창고가 조사되는 예는 그리 흔
하지 않다. 이 유적이 초기의 대표적인 농경유적이라는 점과 창고의 존
재는 농경사회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6)풍부한 목기 자료 확보
광주 신창동을 비롯한 몇몇 유적에서 목기가 출토된 적이 있었다. 그
러나 과거의 도구에 나무가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하면, 우리의 목기유
물 수나 연구는 극히 초보적인 수준이다. 간단한 말뚝에서부터 정교하
게 가공한 목기는 향후의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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