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소식
사적 259호 강화 선원사지
2001-06-13 10:31:00
조회 2185
1. 조사개요
가. 유적 명칭 : 사적 259호 강화 선원사지
나. 유적의 위치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 692-1번지 사적지 및 그 주변지
역(692-2, 693-2, 산 113) 2,575㎡.
다. 조사기간 : 2000년 11월 13일 ~ 2001년 6월 28일 (약 140일간)
라. 조사기관 : 동국대학교 박물관 (관장 장충식)
2. 유적의 연혁
선원사는 고려시대에 몽고의 침입에 항쟁하기 위하여 강화도에 도읍하
고 있을 때, 당시 최고집권자였던 최우에 의해 대몽항쟁의 정신적 지주
로 삼고자 1245년에 창건되었다. 이 사찰은 대장도감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대장경을 체계적으로 봉안・관리하며, 이 대작불사를 원만히
회향하기 위하여 대장도감 옆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선원사
는 당대의 제일 고승인 진명국사가 초대 주지로 취임한 이후, 여러 명
의 국사가 선원사에 주석하였다. 그들에 의해 선원사는 법보를 봉안한
국찰로서 또 국사를 배출한 선찰로서 발전을 거듭하였다. 충렬왕 때에
는 임시 궁궐로 사용될 만큼 규모가 웅대했지만, 조선 태조대에 대장경
이 서울의 지천사로 옮겨진 후 점차 쇠퇴하였다.
3. 조사 목적
현재 전면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곳은 사적지의 내부와 북단 일부이다.
이번 4차 발굴에서는 여러 지도위원들의 견해에 따라 사적지의 내부 곳
곳에 보이는 중복 유구에 대한 정밀 발굴 조사를 실시하고자 한다. 그
리고 탐색갱 조사를 통해 동시대의 건물지가 확인된 사적지 동북단 지
역을 전면 발굴하고자 한다. 동시에 탐색 작업만 이루어진 사적지 서
남단부의 추정 중문지대를 전면 조사하여 본 건물지군의 성격을 보다
명백히 하고자 한다.
이는 주변 지역의 탐색 조사에서 노출된 유구들에 대해 연차적인 조사
계획에 따른 것으로, 이를 통해 유적의 정확한 범위・건물 유구와 구
조・규모 등을 파악하여 유적의 정확한 성격을 밝히고자 한다. 그 결
과 선원사이었음이 확인될 경우, 향후 이의 정비 및 복원에 대한 기초
자료로 활용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대장경판각과 관련된 선원사의 사
적 의미와 고려후기 건축사의 중요 자료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4. 조사내용
- 1차 발굴 지역 : A, B 지구
- 2차 발굴 지역 : C, D 지구
- 3차 발굴 지역 : E, F 지구
- 4차 발굴 지역 : F, G 지구
1) F지구
① 5층단으로의 교통로 및 북 제2석축
E지구 동 제1건물지 북단 교통로로부터 동쪽의 실외로 나와 북쪽으
로 꺾여 제5층단 상으로 올라가는 교통로가 확인되었다. 또한 이 교통
로를 동서 방향으로 관통한 배수로(폭 상단 27cm, 하단 40cm, 높이
60cm, 동서 길이 3.6m)가 노출되었으며, 이 배수로는 동쪽으로 약
2.8m 흐르다 남으로 꺾여 약 3m 내려간다. 여기서 폭 1.3m의 동서 방향
으로 8.6m 뻗어있는 배수로와 십자(十)로 교차하여 동 제2건물지의 서
쪽 기단과 만나며 암거 시설로 된 배수로(외폭 80cm, 내측 좌우
30cm x 높이 17cm, 남북 길이 7.5m)로 변하여 C지구 쪽으로 내려가고
있다.
그리고 F지구의 북단으로 한 층단 높은 지형이 있다. 이 상면에 대형
건물들이 들어선 G지구가 있는데, 두 층단이 만나는 경사면에 대형 할
석을 이용한 남향 석축(북 제2석축)이 동서 방향으로 현재 약 60m 이
상 노출되어 있으며 추정 높이는 약 4m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② 東 건물지
C지구의 중앙석축 동단부에서부터 올라온 행랑이 연결되는 남향의
건물지(전면 : 24.2m, 측면 : 10.4m)가 노출되어 있다. 전면은 5칸으로
추정되며 주칸은 340m이다. 측면은 3칸으로 중앙칸은 간격이 4.4m이
고 좌우칸은 1.9m로 중앙칸이 넓은 건물지다. 일부 적심들이 완전히 교
란되어 정확한 칸수를 파악하기 어렵다. 남아 있는 초석은 60cm x
100cm, 85cm x 85cm 크기의 할석으로 만들어졌고, 적심의 직경은
1.4m~1.5m정도이다.
전면인 남쪽 기단은 높이 1.6m의 석축이 활용되었고, 서단부쪽은 중
앙 석축의 동단부에서 올라온 행랑이 연결되고 있다. 현재 노출된 건물
지 내부에 특별한 유구가 없어 어떤 용도로 지어진 건물지인지 알 수
가 없다.
③ 南 건물지
F지구 동 건물지의 동남단에 인접하여 전면 2칸, 측면 2칸의 소형 건
물지가 확인되었다. 동서 주칸은 3.7m, 남북 주칸은 3.5m 정도로서 적
심의 직경은 1.5m이고 대형 할석(대 : 100cm x 80cm, 소 : 80cm x
80cm)을 초석으로 사용하였다. 서쪽 기단선은 배수로의 동벽으로 사용
되었고, 동쪽 기단선은 대형 할석을 이용하여 남북방향으로 약 7m정
도 정연하게 쌓아졌다.
이 소형 건물지의 전면으로 보이는 남단은 중앙석축이었을 것으로 보
이는데 현재 완전히 유실된 상태이다. 북쪽은 동 건물지의 남단 기단
으로 이용된 석축의 전면에 바로 붙어 있어 북쪽 기단부가 불분명하
다. 건물의 용도는 그 규모로 보아 주거 공간보다는 종루와 같은 건물
지가 아닐까 여겨진다.
2) G지구
① 북 제3석축과 대형건물지
G지구의 대지는 대략 600여평 정도로 파악되는데, 그 남단부에 동서
방향으로 약 30m 정도 뻗은 남향 석축(북 제3석축)이 노출되어 있다.
이 석축은 G지구의 대지를 확보하며, 동시에 그 북단에 위치한 대형건
물지의 전면 기단으로 사용되었다. 이 대형건물지는 남향하는 전면 5
칸, 측면 3칸의 건물지로 적심의 직경이 대체로 1.5m~1.6m에 이른다.
주칸의 간격은 동서는 4.5m, 남북은 3.8m이며, 기단 길이는 측면과 후
면이 불분명하나 전면 28m, 측면 16.7m정도로 추정된다. 이 규모는 발
굴 조사된 건물지 중에서 중앙건물지대의 금당지 다음으로 큰 건물이
다.
그러나 이 대형건물지에는 일부 초석들로 보이는 대형 석재들이 남아
있는데, 다른 건물지의 적심이나 초석 상태보다 그 짜임새가 엉성하
다. 한편 이 초석들의 바로 하층 약 20cm 정도 낮은 레벨에서 소형의
건물 유구들이 중복 노출되고 있다. 이 하층 유구와 관련된 토층에서
출토된 와편이나 막새류가 다른 건물지에서 출토된 것들과 같아 동시
대 건물지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이 하층 유구들에 대한 추가 조사가
필요할 듯 하다.
한편 북 제3석축은 이 대형건물지의 하중을 제대로 지탱하며, 일종의
통로로도 사용하기 위한 목적에서 설치된 듯한 보강석축이 조성되어
있다. 보강석축은 동서 방향으로는 대형건물지의 전면 기단 길이와 같
은 28m로 추정된다. 남쪽으로는 폭 6m에 이르는 3열의 보강석축이 조
성되어 있다. 또한 이 보강석축 내에는 대형건물지의 동서방향 적심과
남북으로 연결되는 소형의 초석들이 2열씩 자리하고 있어 아마도 대형
건물 전면(남쪽)의 교통로상에 지붕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 대형건물지의 중앙칸의 적심 사이에는 석열이 동서방향으로
연결되어 있어 어떤 목적을 지닌 듯 보이나 그 용도를 알 수 없다. 또
한 보강석축 남단의 중앙부(폭 2m)가 전면으로 약 0.9m정도 돌출되어
있다. 이 돌출부는 대형건물지의 중앙칸과 일치하고 있어, 이 곳이 건
물의 중심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② 북 제4석축
대형건물지의 북단에 동서로 뻗어 남향하는 석축이 노출되어 있다. 현
재의 지형을 감안할 때, 이 석축은 사역의 북쪽 경계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석축 전면에 쌓인 와편을 포함한 교란토가 북쪽이 높고
남쪽으로 비스듬히 경사지며 낮아지는 상황이 주목된다. 이는 북 제4석
축의 후면(북)에 조영되었던 건물이 전면(남)으로 무너졌던 결과로 보
인다. 사실 북 제4석축의 서단부 후면의 급경사면 위에는 건물이 조영
될 만한 평탄한 대지가 있다. 또한 석축 동단부의 후면(북)으로도 완만
한 대지가 조성되어 있어 건물지가 조성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③ 동건물지
대형건물지의 동편으로 전면 5칸, 측면 3칸의 남향하는 건물지가 노출
되었다. 기단 길이는 전면(동서)은 16.2m이고 측면(남북)은 10.4m이
다. 주칸의 간격은 전면의 경우 서쪽 2칸은 주칸이 3m이고 중앙부는 주
칸이 3.3m 그리고 동단부는 주칸이 2.5m로 주칸이 조금씩 다르다. 특
히 동쪽 2칸은 구들 시설이 설치된 주거 공간이었다. 측면의 주칸은 첫
칸은 1.8m, 둘째칸은 3.3m, 셋째칸은 2.1m로서 역시 주칸이 모두 다르
다. 초석은 크기 63cm x 59cm, 110cm x 95cm 등 다양한 크기의 할석
을 사용하였으며, 적심의 직경은 약 1.7m 내외로 보인다.
동쪽 2칸은 할석과 와편을 이용한 구들 시설(사진 7)이 있는데, 대체
로 와열의 폭은 35cm ~60cm으로 부분적으로 다양하고, 골의 폭은
25cm ~ 35cm, 깊이 40cm 정도이다. 다른 건물지의 구들이 남북 방향
으로 길게 뻗은데 비해 장방형의 모습을 가지고 있음이 주목된다. 그러
나 그 동단이 조사 영역을 넘어섰기 때문에 전면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
지 못하였다. 단지 구들의 골의 모습이나 벽면의 흙이 탄 것을 감안할
때 아궁이는 동남단에 있었고, 아궁이에서는 3열로 시작되어 북쪽에서
는 다열의 골로 확장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의 용도는 동편의 두 칸만 구들이 설치된 것을 볼 때, 동단부는 주
거 공간이고, 중앙칸부터 서단부는 다른 용도로 사용한 복합 건물이 아
닐까 생각하나 구체적 용도는 알 수 없다.
3) 기타 지역
① 사적지 남단의 중문지 전면과 남 제3석축
B지구의 남단에서 문지(중문지)와 함께 좌우 회랑이 노출되었다. 우
선 중앙부에 위치한 문지의 경우, 좌우 회랑지의 적심과 비교할 때, 적
심의 크기와 주칸에 차이가 있다. 문지의 주칸은 동서 4m이며 남북도
4m로 좌우편의 회랑지와 간격은 같다. 그러나 적심의 직경이 1.6m로
회랑지의 적심(1.2m)보다 크다. 문지는 정면 3칸의 3문 형태이며 측면
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남쪽 경사면의 중단에 있는 대형 할석을 적심석
의 일부로 본다면 2칸 이상으로 볼 수 있을 듯 하다.
대체로 문지 중앙부의 남단은 그 좌우 편과 달리 남쪽으로 더 돌출되
어 있고 완만한 경사를 가지며 내려가고 있다. 아마도 계단시설이 있었
으리라 생각되었지만, 발굴 조사 결과 문지 적심에 연결될만한 잡석군
만 나올 뿐 특별한 계단시설은 보이지 않는다. 또한 남 제3석축(추정
높이 2.5m)의 서단부도 석축 하단부의 일부만 확인되었다. 아마 99년
에 철거된 민가에 의해 이곳이 심하게 교란되며 흩어져 버린 듯 하
다.
② D지구 중남단 건물지
동남단에서 중앙건물지군과 동시대의 것으로 볼 수 있는 남북 방향으
로 길게 조성된 축대(건물지의 기단선으로도 활용)와 함께 부분적인 후
대 건물지 및 배수로 등이 노출되었다. 이 곳은 근래까지 건물지가 있
었던 곳으로 본래 축대로 조성된 대지 상에 건물지가 약 2개소 존재하
였을 것으로 보지만, 현재 남아 있는 적심들은 희미하다. 아마도 후대
건물지가 들어서며 심하게 교란된 것으로 건물지의 정확한 규모를 파
악하기 어렵다.
4) 출토 유물
F・G지구의 출토 유물은 대체로 와전류가 대부분으로 다른 지역에서
출토된 와전류와 출토 양상이 비슷하다. 기와의 양식도 중앙건물지대
와 동일하며 막새도 역시 그러하다. 다만 주목할 만한 점은 ⌈Om Ma
ni Pad me Hum(唵摩尼叭迷哞)⌋이 새겨진 범자문막새와 ⌈朴氏・劉氏
銘⌋막새가 상대적으로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는 점이다.
또한 높이 4.7cm, 폭 1.2cm의 청동나한상(사진 10)이 수습되었고, 두
루마리 사경축의 마무리 금동장식품(사진 11), 불에 완전히 탄 금니사
경편(사진 12), 묵서사경편(사진 13, 14) 등이 수습되었다. 이러한 유물
들은 본 건물터의 성격을 이해하는 방증 자료가 될 수 있다.
더불어 사적지 동단의 C・D지구에 비해 그 북단의 F・G지구에서는
자기편의 출토수가 절대적으로 적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F・G지구
의 경우, 단순한 주거나 생활 공간은 아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5. 조사의견
우선 사적 259호로 지정된 선원사지는 학계에서 그 위치 비정, 판각 여
부 및 경판 소장 등의 문제를 놓고 적지 않은 이견이 있어 왔던 곳이
다. 그러므로 본 발굴단은 현 사적지의 발굴조사를 통하여 이와 같은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면 이상의 유구 노출 상황과 출토 유물을 통해 본 건물지의 성격
을 생각해 보자. 먼저 지금까지의 발굴 조사 과정에서 밝혀진 유구의
현상을 통해 볼 때, 대체로 현 사적지로 지정된 터는 가궐터가 아닌 사
찰지임은 확실하다.
그것은 첫째, 본 사적지내 서단부의 A지구에 본 건물지군에서 가장
큰 대형건물지(기단 길이 전면 38m, 측면 18m)가 있으며 이 건물지를
중심으로 회랑지를 포함한 총 12개의 소형 건물지가 동서남북 사방에
서 좌우 대칭으로 조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대형건물지가
차지하는 건물지 내에서의 위격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데 바로 이 대형건물지 내의 중심부에는 凸형의 시설이 존재하였고, 여
기에서 직경 3.7m 전후의 원형 석군 3개소가 노출되었다. 이는 삼존불
을 지탱하기 위한 기초 적심석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고, 따라서 중앙
부의 凸형 유구는 삼존불을 안치했던 불단임이 밝혀진 것이다.
이에 사적지의 서단부와 그 북단인 A・B・E지구의 경우, 사적지내의
중심건물지대로서 남에서부터 북으로 중문지 - 금당지 - 강당지(추측)
와 주변 부속건물지의 전형적인 사찰 건물 배치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는 점이다. 물론 현 지형은 구릉성 지대로 남북 방향으로는 많은 층단
이 있고, 동서로 넓고 긴 지형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삼국시대나 통일
신라시대의 평지 가람처럼 전 건물지가 정연한 좌우 대칭의 양상을 갖
지는 못하지만, 예불공간인 중심건물지대만은 이의 전통을 따르고 있
음이 주목된다. 그리고 이와 같이 정연한 좌우 대칭의 중앙건물지대
와 몇몇 부속 건물지의 거대함 등은 어떤 국가적 차원의 지원과 계획
하에 조영되었던 건물지라는 것을 시사한다.
출토 유물의 성격을 통해 볼 때도, 본 건물지가 사찰 건물이었음을 뒷
받침한다. 우선 수습된 대부분의 막새류가 연화문이나 범자문이 주류
를 이루어 불전과 관련된 건물들이 많이 조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한 개인신앙 차원으로 볼 수도 있지만 소형의 금동 탄생불과 청동나한
상, 그리고 사경편 등이 출토된 것은 사찰지였음을 입증하는 방증 자료
가 된다. 더구나 청동나한상의 경우 일반인들이 개인 신앙의 차원에서
호신불로 지니기에는 부적당하다.
그리고 각종 와전류의 유물들이 지닌 화려함을 볼 때, 매우 품격높은
건물들이 조영되었고 당시 강도 시절의 사찰로서 매우 큰 사회적・정
치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곳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
들의 편년이 대체로 선원사의 존속 시기인 1245~1398년과 관련된 시
기의 것으로 파악된다는 점도 주목된다. 한편 사적지 동북지역인 G지
구에서 집중적으로 다수 발견된 ⌈朴氏・劉氏⌋銘 막새는 본 건물지군
이 왕을 위해 지어진 가궐터라면 발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이 사찰지가 선원사지일 가능성을 살펴보자. 우선
발굴단은 현재의 사적지가 선원사지였음을 입증할 수 있는 명문와나
금석문 등의 직접적인 고고학적 발굴성과를 얻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선원사지임을 방증할 수 있는 자료들이 있다. 그것은 첫째, 유물 편년
을 통해 볼 때, 현재의 사적지는 선원사의 존속연대와 일치될만한 사찰
지라는 점이다. 둘째, 선원사는 중창한 사실이 있는데, 현재의 건물지
들도 중앙건물지군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중창과 더불어 외관을 정비
한 흔적이 있다. 셋째, 선원사의 판각 및 경판 소장을 감안하면 강화도
내에 현재의 터보다 더 적합한 지역 및 건물지는 없다는 점이다. 반대
로 이와 같은 대규모의 불교유적지가 문헌자료 상에서 선원사 이외에
는 비정될 만한 곳이 없으므로 현재의 터가 선원사일 가능성은 더욱 크
다. 더구나 이곳이 가궐터라는 견해도 있지만, 선원사 자체가 고종과
충렬왕 등이 잠시 거처하기도 하여 문헌상에 일시적으로나마 신니동
가궐로서 기록될 가능성도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 계속하여 동시대의 건물지군의 존재가 확인된 사적
지 밖의 남쪽・서쪽 지역에 대한 발굴조사가 필요하다. 특히 중앙건물
지대 남단의 중문지로부터 서회랑이 연결되고, 또 북단의 E 지구에서
도 회랑이 계속 연결되는 서쪽 지역에 대한 전면 조사가 요구된다. 중
앙건물지대에 포함되고 또한 평탄한 현재의 터를 감안하면 이곳에 경
판고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문헌상에 선원사가 팔만대장
경의 봉안처였음은 확실하였으므로 만일 여기서 경판고가 확인될 경
우, 본 건물지군이 선원사지임은 명백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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