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소식
서울 홍련봉 1보루 발굴조사 지도위원회의
2004-08-23 17: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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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홍련봉 1보루는 서울시 광진구 광장동 산 74-1번지 일대에 위치해 있
다. 홍련봉 1보루는 1942년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보물고적조
사자료』에 城址로 보고되어 있으며, 1994년 구리문화원에서 실시한
아차산일원의 지표조사를 통하여 고구려 토기와 기와가 수습되어 고구
려 보루로 보고되었다. 이후 아차산 4보루와 시루봉보루의 발굴조사와
더불어 몇 차례의 지표조사가 실시된 바 있으며, 이러한 조사를 통하
여 아차산일원 보루들 중에서 유일하게 기와가 출토되는 점 때문에 중
요한 유적으로 평가되어왔다.
이번의 발굴조사는 금년도 2월부터 서울시에서 추진 중인 아차산일대
고구려 보루군에 대한 발굴 및 보존사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발굴조사는 2004년 5월 6일부터 8월 23일까지의 110일간의 일정으로
실시되었다.
금번조사를 위한 조사단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조사 기관 : 고려대학교매장문화재연구소
조사 단장 : 이홍종(고려대학교매장문화재연구소 소장, 고고미술사학
과 교수)
책임조사원 : 최종택(고려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지도 위원 : 임효재(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노태돈(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최병현(숭실대학교 사학과 교수)
자문 위원 : 권오영(한신대학교 교수)
심광주(한국토지박물관 연구실장)
조 사 원 : 손준호(고려대학교매장문화재연구소 선임연구원)
임희진(고려대학교매장문화재연구소 연구원)
박성희(고려대학교매장문화재연구소 연구원)
김현욱(고려대학교매장문화재연구소 연구원)
조사보조원 : 조은지(고려대학교매장문화재연구소 연구원)
오준정(고려대학교매장문화재연구소 연구원)
이수진(고려대학교매장문화재연구소 연구원)
이정안(고려대학교매장문화재연구소 연구원)
이지윤(고려대학교매장문화재연구소 연구원)
2. 유적의 입지
구리시 서쪽과 서울시 동쪽 경계를 이루고 있는 아차산은 일반적으로
서쪽의 龍馬峰과 북쪽의 烽火山 등 주변 산지를 포함하는 명칭으로 사
용된다. 아차산의 남쪽에는 漢江이 흐르고 있고, 동쪽으로는 中浪川,
서쪽으로는 王宿川이 흘러서 한강으로 유입되고 있다. 아차산은 해발
285.8m로 그리 높은 산지는 아니나 주변의 용마봉(해발 348m)과 함께
인근에서는 가장 높은 봉우리를 이루고 있으며, 남으로는 한강 이남의
전 지역이 한눈에 들어오고, 북으로는 멀리 의정부에 이르는 길목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유리한 입지를 가지고 있다. 또한 풍수지리적으
로 볼 때 아차산은 木德으로 北岳(土德), 冠岳(火德), 桂陽(金德), 紺岳
(水德)과 더불어 북악산록을 명당길지로 만드는 五德山 중의 하나로 南
行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번에 발굴조사한 홍련봉 1보루는 이 아차산 줄기의 남쪽 끝자락에 위
치해 있는 독립구릉으로 북서-남동 방향으로 긴 땅콩모양을 하고 있
다. 타원형의 홍련봉은 해발 126.3m의 북쪽 봉우리와 해발 125.1m의 남
쪽 봉우리로 나뉘어 있는데, 서로 150m 가량 떨어져 있다. 홍련봉 1보
루는 남쪽 봉우리에 축조되어 있으며, 북쪽 봉우리에는 홍련봉 2보루
가 축조되어 있다. 홍련봉은 비고 60미터 가량의 나지막한 구릉의 형태
이나 한강 이남과 중랑천변 일대가 잘 조망되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홍련봉 1보루 동북쪽으로 직선거리 약 600미터 지점에 아차산성이 위
치해 있으며, 북쪽으로는 아차산 주 능선과 용마봉능선을 따라 16개의
보루가 분포하고 있다. 아차산성은 삼국시대 阿旦城에 비정하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의견인데, 아단성은 396년 광개토왕의 남정시에 공취
한 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475년 장수왕이 함성을 공함할 당시 개로
왕을 아단성 아래로 압송하여 죽였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이들 두 기록
에 따르면 아단성 즉, 아차산성은 396년 이전 백제가 축성하였으며,
475년에는 고구려가 사용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1999년 시굴
조사 결과에 따르면 현재의 성벽은 7세기 초 신라가 쌓은 것으로 밝혀
지고 있으며, 성 안에서 백제나 고구려와 관련된 시설물은 확인되지 않
았다. 그러나 당시의 조사가 아차산성 일부 지점에 대한 시굴조사의 성
격이므로 전면조사를 실시할 경우 백제와 고구려와 관련된 시설이 확
인될 가능성을 배제하기는 어렵다.
아차산일원에는 아차산성을 제외하고 모두 16개소의 보루가 분포하고
있으며, 홍련봉보루 서남쪽의 한강변에도 구의동보루와 자양동보루가
위치해 있다. 아차산의 주 능선에는 5개소, 용마봉 능선에는 7개소의
보루가 있는데, 모두 능선상의 작은 봉우리들에 위치하고 있다. 이 중
아차산 4보루와 시루봉보루는 이미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자세한 내용
이 밝혀진 바 있다. 이들 보루들은 400~500미터의 간격을 두고 배치되
어 있으며, 봉우리를 중심으로 원형 또는 장타원형의 성벽을 쌓고, 내
부에는 온돌시설이 포함된 막사용 건물과 저수시설 등의 시설물을 구
축하였다.
발굴조사와 기존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한강변에 위치한 구의동보루에
는 10여명의 군사가 주둔하였으며, 아차산 4보루와 시루봉보루에는
100여명의 군사들이 주둔하였다. 또 이들 보루는 대략 500년을 전후한
시점에 축조되어 551년 나제연합군에 의해 함락당할 때까지의 약 50여
년 동안 사용되었으며, 한강을 경계로 하여 중랑천변의 평지와 왕숙천
변의 평지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축조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3. 조사경과 및 조사방법
발굴조사에 착수하기 전 유적은 봉우리 정상부에 펼쳐진 비교적 평탄
한 타원형의 지형을 이루고 있었으며, 아카시아와 도토리나무 등 잡목
이 우거져 있었다. 잡목을 제거하자 남동-북서 방향으로 긴 타원형의
윤곽이 드러났다. 유적의 중심부와 북쪽에는 두기의 민묘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평탄면의 외곽을 따라 곳곳에 예비군용 참호가 구축되어 있
었다. 이들 후대 시설물의 설치로 인해 유적의 곳곳이 훼손되어 할석
과 강돌이 노출되어 있었으며, 중심부 민묘의 활개 주변에는 활개를 쌓
을 때 파헤쳐진 기와가 다수 노출되어 있었다. 또, 유적의 제일 북단부
는 주변보다 높은 지형을 이루고 있었는데, 1970년대 이후 현대 군인들
에 의해 쌓아진 것임이 조사과정에서 밝혀졌다.
잡목을 제거하고 유적의 상황을 기록한 후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갔다.
유적의 곳곳에 훼손이 심하였으므로 그리드를 설치하여 발굴하기로 결
정하였는데, 유적의 장축은 남동-북서방향으로 틀어져 있었으나, 편의
상 자북방향을 축으로 하는 그리드를 설치하였다. 먼저 유적 중심부 민
묘의 활개가 끝나는 지점 주변에 기준점을 설치하고 사방 5m 크기의
그리드를 설치하였다. 유적의 전반적인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기준선
을 따라 동서-남북으로 폭 2m, 길이 5m의 탐색트렌치 열을 그리드 내
부에 설치하였으며, 이 트렌치열의 네 끝부분에는 긴 트렌치를 성치하
여 성벽의 위치를 확인하였다. 이후 탐색트렌치 굴토 결과를 바탕으로
사방 5m 크기의 그리드 단위를 굴토하는 방식으로 발굴을 진행하였으
며, 유구를 확인한 후 둑을 제거하고 유구를 노출시켜 조사하였다.
4. 조사내용
1) 개요
홍련봉 1보루도 이미 발굴된 다른 보루와 마찬가지로 석축 성벽을 쌓
은 후 내부에 건물을 축조한 구조를 하고 있다. 유적의 규모는 남북으
로 최장 46m, 동서 방향의 폭은 37m 가량이다. 발굴조사 전 기와가 채
집된 점 때문에 구조가 양호한 시설물의 존재를 기대하였으나, 훼손이
심하여 대부분의 건물은 기단부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탐색트렌치를
통해 층위를 확인한 결과 유적을 덮고 있는 퇴적토의 두께는 지점에 따
라 차이가 있었지만 대체로 20cm 가량의 표토층을 제거하면 통일신라
시대 유물이 출토되는 층이 확인되었으며, 그 아래에는 두 개의 고구
려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고구려 문화층은 지점에 따라 암반풍화토를
그대로 이용하거나 마사토나 점토로 다져진 층을 바닥 면으로 이용하
였다.
고구려 문화층에서는 적은 수이지만 온돌유구와 저수시설 및 배수시설
이 확인되어 아차산 4보루 및 시루봉보루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인 요소
는 다 갖추고 있었다. 아직 발굴이 완료되지 않은 일부 지점에 대한 조
사와 정밀 측량을 통한 분석을 끝내야 하지만 현재까지의 결과를 통해
볼 때 이 유적에는 1기의 저수시설과 최소 8기 이상의 건물이 축조되
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 성벽
성벽은 지형을 따라 타원형으로 쌓았는데, 유적의 동남부 모서리에 雉
를 설치하였으며, 치를 포함함 성벽의 총연장 길이는 145m 가량 된다.
치의 규모는 사방 7m 가량으로 추정되는데, 이 부분에 인근 별장의 물
탱크가 설치되어 있어서 치에 대한 발굴은 불가능 하였다. 조사 일정상
의 문제와 사후 보존의 문제 때문에 유적의 동서남북 각 지점별 일부만
을 노출시켜 조사하였다. 각 지점 모두 다듬어진 석재를 이용하여 축성
하였는데, 석재의 크기도 일정하지 않으며, 쌓는 수법도 정교하지 못하
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발굴된 시루봉보루와 비슷한데, 잘 다듬어진
석재를 이용하여 정교하게 축성한 아차산 4보루와 달리 규격화되지 않
은 석재를 사용하여 성글게 쌓은 것은 석재의 물성과도 관련이 있는 듯
하다. 즉, 아차산 4보루의 축성에 사용한 석재는 치석이 용이한 화강암
인 반면에 시루봉보루와 홍련봉 1보루의 경우는 치석이 어렵고 얇게 갈
라지는 성질의 석재를 사용한 탓에 성 돌 자체를 규격화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모두 5개 지점의 성벽을 조사하였는데, 각 지점별 축성 방법 및 잔존 상
태에도 다소 차이가 있다. 제1지점 S1E4 그리드 동쪽 성벽의 경우 풍화
암반을 깎아 평탄면을 만든 후 그 위에 축성하였으며, 일부 지반이 약
한 부분은 불을 놓아 바닥을 다진 후 축성하였다. 성벽 안쪽은 폭 1m
가량은 석재를 쌓았으나 그 안쪽은 흙을 다져서 뒤를 채웠다. 또, 성벽
바깥쪽에는 목재를 세웠던 지름 20~30cm의 기둥구멍이 확인되는데,
구멍의 간격은 일정하지 않다. 이 지점의 성벽은 8~9단이 남아있으며,
남은 높이는 1.8m 정도이다.
제2지점 성벽은 N5W1 그리드에 위치해 있으며, 축조방식은 제1지점과
비슷하다. 다만 이 지점은 풍화암반이 아닌 퇴적토를 깎아 평탄화한
후 축성하였으며, 성벽 바깥쪽으로 기둥을 세웠던 자리가 남아있다. 잔
존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며, 10단에 2m 가량이 남아있다.
제3지점 성벽은 N4W3 그리드에 위치해 있다. 역시 퇴적토를 정지하고
성벽을 쌓았으며, 부분적으로 불을 놓아 다진 흔적이 남아있다. 이 지
점의 성벽은 원래 축성한 성벽이 안쪽에 일부 남아 있어서 2차에 걸쳐
쌓은 것으로 보이며, 2차 축성의 성격은 보수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
로 추정된다. 이 지점에는 성벽 밖으로 기둥을 세웠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제 4지점 성벽은 S1W4 그리드에 위치해 있으며, 축성방식은
제2지점과 동일하나 기둥구멍은 확인되지 않는다.
제 5지점 성벽은 S5W1, S5E1 그리드에 걸쳐 있는데, 훼손이 심하다.
이 지점의 성벽도 3지점과 같이 2차에 걸쳐 축성되었으며, 2차 성벽은
보수차원에서 축성된 것이다. 특히, 그리드 S5W1 부분은 1차 성벽이
완전히 붕괴된 지점에 새로 성벽을 쌓은 것이 확인된다.
3) 기단과 온돌
8개의 건물 기단시설과 2기의 온돌이 확인되었다. 이 중 1호 기단은 2,3
호 기단의 아래층에 위치해 있으며, 8호 기단을 제외하고는 모두 단층
의 기단 시설이 남아있다. 8호 기단은 유적의 가장 북단에 위치한 건물
의 기단이며, 유일하게 4단 이상이 남아있다. 또, 1호와 5호 기단은
‘ㄱ'자로 꺾여 있으나 나머지는 모두 직선이며, 모서리는 확인되지 않
는다. 4호 기단과 5,6,7호 기단은 같은 방향을 하고 있으며, 기단 열 사
이의 거리도 8m 가량으로 일정하다.
이들 기단시설은 아차산 4보루에서 확인된 것과 같이 담장식 벽체의 기
단시설로 추정된다. 다만 8호 기단의 경우 4단 이상의 기단이 남아 있
어서 그 자체가 건물의 벽체 기초시설이라기 보다는 건물 외곽의 기단
시설로 추정된다. 어쨌든 기단은 건물과 관련된 시설이며 이를 통해
이 유적에는 최소 8기의 건물이 축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온돌은 2기가 조사되었다. 1호 온돌은 S2E2 그리드 서북 모서리 부근
에 위치하며, 민묘의 활개 속에 들어 있었다. 이 온돌은 2호온돌이나 아
차산 4보루나 시루봉보루의 온돌과는 달리 작은 할석을 이용해 축조하
였으며, 뚜껑은 남아있는 것이 없다. 이 온돌은 층위상 저수시설이 폐
기된 후 퇴적된 층에 축조되어 있어 가장 늦은 시기에 사용된 것이며,
주위에서 기와가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2호 온돌은 N2W1 그리드 북동모서리 부근에 위치해 있으며, 가로⋅세
로 각 20cm 가량의 판석을 이용해 벽석을 세우고 뚜껑을 덮은 형태이
나 뚜껑은 무너져 있다. 온돌고래의 폭은 60cm, 깊이는 20cm 가량으
로 아차산 4보루나 시루봉보루에서 확인되는 일반적인 형태의 온돌이
며, 끝부분이 발굴 둑 안으로 연장되고 있어 전체 규모와 형태가 불분
명하나 현재 2m 가량이 남아있다.
4) 저수시설
S2E2, S2E3, S3E2, S3E3 그리드에 걸쳐 있다. 풍화암반을 굴토하여
만들었으며, 규모는 남북 방향의 길이 710cm, 동서 방향의 폭 666cm,
깊이 278cm이다. 바닥에 70cm 두께로 뻘을 채웠으며, 벽체에도 통나무
를 쌓아 가면서 뻘을 발랐다. 이처럼 바닥과 벽체에 뻘흙을 바른 이유
는 방수를 위한 것으로 사용할 당시에는 통나무가 저수시설의 벽체 역
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뻘흙의 두께를 제외하면 저수용량은 75m3
이다.
5) 배수시설
S3W1 그리드에서 길이 3.5m 가량의 배수시설이 확인되었다. 크기가
다른 여러 매의 판석을 이용해 벽채를 세우고 뚜껑을 덮었던 것으로 현
재 뚜껑은 남아있지 않다. 배수구의 양끝이 훼손되어 정확한 관계를 설
정하기는 어렵지만 4호 기단과 관련된 시설로 보인다.
6) 소형석곽
N2W1 그리드 2호 민묘 바로 북쪽의 통일신라시대 층에서 확인되었다.
굴광의 흔적은 보이지 않으며, 작은 할석을 세워서 벽체를 만들고 바닥
에는 고구려 기와를 깔았다. 석곽의 길이는 120cm, 폭은 64cm, 깊이는
18cm로 소형이다. 부장유물이 없어 정확한 축조 시기와 성격을 파악하
기 어려우나 인근의 아차산성에 주둔하였던 신라군에 의해 축조된 것
으로 추정된다.
5. 출토유물
아차산 4보루 및 시루봉보루와 마찬가지로 출토유물의 대부분은 토기
류 및 철기류이나, 홍련봉 1보루에서는 아차산 보루 중 유일하게 기와
가 출토되는 것이 특징적이며, 남한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연화문 와당
도 3점 출토되어 주목된다.
1) 토기
토기는 모두 파편상태이며, 유적의 훼손이 심한 탓에 출토 수량이 그
리 많은 편은 아니다. 토기는 모두 고구려 토기의 전형적인 특징을 갖
추고 있는데, 니질태토이며, 평저기형에 대상파수가 부착되어 있고, 문
양이 시문된 토기가 거의 없다. 제작기법이나 형태상의 특징은 이미 조
사된 아차산 4보루나 시루봉보루 및 구의동보루 출토품과 유사하다. 호
⋅옹류, 동이류, 완류, 접시류, 뚜껑류 등이 대부분이며, 그밖에 연통
류, 이배류 등 대부분의 고구려 토기 기종이 모두 출토된다. 출토유물
중 완이나 접시의 바닥에는 여러 가지 부호가 새겨진 예가 많으며, 명
문이 새겨진 토기도 2점 확인되었다. 하나는 완류의 뚜껑 조각으로 ‘夫’
자가 새겨져 있다. 다른 한 점은 완류의 바닥으로 추정되는데, ‘父’자가
새겨져 있다. 2점 모두 토기를 소성하기 전에 문자를 썼으며, 주변이 깨
어져서 다른 글자의 존재 여부와 내용을 자세히 알기 어렵다.
고구려 토기 외에 통일신라시대 층에서 신라 토기도 소량 출토되었다.
2) 기와
기와는 8호 기단 윗면과 1호 온돌 주변의 두 곳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
었다. 두 곳에서 출토된 기와는 모두 같은 양식인데, 기와의 표면색은
적색이나 회색이며, 일부는 고온으로 소성되어 회청색을 띠며 경질인
것도 있다. 기와의 등문양은 대부분 승문이며, 종방향으로 시문된 것
이 일반적이다. 기와 내면에는 눈이 가는 포흔이 찍혀 있으며, 모골흔
이 뚜렷하다. 기와를 만드는 바탕흙은 니질이나 일부 모래가 섞인 것
도 있다. 기와의 외곽은 대부분 2~3차에 걸쳐 정면하여 매끈하다.
다량의 기와와 함께 蓮花文 瓦當이 3점 출토되었다 3점 모두 반파된
채 출토되었으며, 가운데 子房의 일부도 훼손되었으며, 동일 와범에 의
해 제작된 것은 아니나 같은 양식에 속한다. 전체적으로 옅은 적갈색
을 띠고 있으며, 태토는 니질이다. 막새면에는 單瓣蓮花文과 變形花瓣
을 교대로 네 판씩 배치하였다. 연판 사이에는 8개의 삼각형 珠文을 돋
우새겼으며, 가운데 자방에는 2조의 돋을 테를 둘렀다.
2) 철기
토기 및 기와와 함께 소량의 철기가 출토되었다. 철기는 철모 1점을 포
함하여 철촉과 찰갑편 등이며, 철모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파손된 상태
이다. 조사완료 후 보존처리를 실시하여야 정확한 내용을 파악할 수 있
을 것이다.
6. 조사 성과
이상과 같은 발굴조사를 통하여 홍련봉 1보루는 아차산 줄기 남쪽 끝자
락의 구릉에 위치한 고구려 보루로 확인되었다. 보루는 평면은 남동-북
서 방향의 타원형이며, 외곽에 성벽을 쌓고 내부에 온돌을 포함한 건물
과 저수시설 및 배수시설 등을 설치한 구조이다. 성벽의 총 길이는
145m이며, 남동쪽 모서리 한강 쪽으로 사방 7m 크기의 치를 설치하였
다. 성벽 안쪽에는 최소 8기 이상의 건물이 축조되었던 것으로 추정되
는데, 기와가 밀집 출토되는 양상으로 보아 이 중 2기는 기와건물로 추
정된다.
출토된 유물이나 당시의 역사적 정황을 통해 볼 때 홍련봉 1보루는 대
략 500년을 전후한 시점에 축조되어 551년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
며, 한강을 경계로 중랑천변의 평지를 방어하기 위한 기능을 하였다.
100여명의 군사가 주둔했던 것으로 밝혀진 아차산 4보루에는 사방 5m
규모의 저수시설이 2기, 시루봉보루에는 사방 10m 규모의 저수시설이
1기 설치되어 있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저수시설 1기가 설치된 홍련
봉 1보루에 주둔했던 군사의 수는 50명 정도로 추산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종합적인 분석을 통하여 밝혀지겠지만 현재까지의 조
사 성과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이번의 발굴조사를 통하여 두 개의 고구려 문화층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향후 상⋅하층의 관계와 유물에 대한 분석을 통해 세부적인
편년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이번의 발굴조사를 통해 다량의 고구려 기와와 함께 연화문와당
1점이 출토되었다. 지금까지 임진강유역에서 고구려 기와가 출토된 예
는 있으나 남한지역에서 와당이 출토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며, 6세기
대로 연대가 확실한 와당자료로서 중요하다.
셋째, 홍련봉 1보루는 아차산 일대의 보루 중 유일하게 기와가 출토되
었다. 고구려에서는 기와의 사용이 궁궐이나 관공서, 사찰 등에 제한되
었다는 기록과 관련해 볼 때 다른 보루에 비해 홍련봉 1보루의 위계가
높았을 가능성을 추론할 수 있다.
넷째, 이번에 발굴된 홍련봉 1보루의 구조상의 특징이 이미 발굴된 아
차산 4보루나 시루봉보루와 동일한 것으로 밝혀짐에 따라 6세기 당시
정형화된 고구려 군사시설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으며, 고구려 고고
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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